임형진(왼쪽) 교수와 조인래 이사장이 2년 전 문화재로 지정된 건국강령 초안을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최근 한 대선 후보가 종부세를 없애 부자 감세하겠다고 하니 많은 언론이 맞장구치더군요. 우리나라 전체 가계가 보유한 토지 32%를 상위 1%가 가지고 있어요. 토지국유화로 부의 균등을 이야기한 조소앙 선생이 살아계셨다면 통탄할 일입니다.”(임형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전 삼균학회 회장)
“수도권과 지방 불균등이 갈수록 커지고 있어요. 지역도 교육과 문화 기반을 갖추고 또 경찰과 사법권 등 실질적인 권한을 갖게 해 소앙 할아버지가 80년 전에 말한 지방자치제가 명실상부하게 실현되길 바랍니다.”(조인래 조소앙기념사업회 이사장)
오는 28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건국강령’(이하 건국강령)을 공포한 지 딱 80년이 되는 날이다. 임시정부 대표적 이론가 조소앙(1887~1958) 선생이 기초한 건국강령은 총강과 복국·건국 3장 24개 항으로 해방 뒤 건설할 국가의 구체적인 모습이 담겼다. 조소앙이 창안한 삼균주의가 토대가 된 이 문건은 보통선거제와 18살 이상 남·여 선거권 부여, 각 도·부·군에 정부와 의회를 설치하는 지방자치제 실시, 토지와 대생산기관 국유화, 국비 의무교육 실시 등 삼균주의 실현을 위한 기본 방안들을 제시했다.
28일 오전 10시30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건국강령 80년 기념식과 ‘건국강령과 신민주주의 이념 삼균주의’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여는 조인래 이사장과 임형진 교수를 지난 17일 경기 고양시 풍산역 근처 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조소앙 선생이 큰조부인 조 이사장은 5년 전에 생업을 접고 사업회를 만들어 이끌고 있다.
임시정부 연구 권위자인 한시준 독립기념관장은 최근작 <대한민국임시정부>(한울)에서 “건국강령으로 임시정부가 건설하려고 한 신민주국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의 결점을 보완한 것으로, (임정은) 인류 역사상 누구도 건설해 보지 못한 새로운 국가 건설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평했다. 임시정부 외무부장을 지낸 조소앙은 건국강령 외에도 임시정부 수립을 제안한 대동단결선언(1917년)과 3대 독립선언서로 불리는 대한독립선언서(1919)를 기초했다. 그가 1920년대 중반에 설계한 삼균주의는 1930년대 이후 좌우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 받아들여 한국 독립운동의 지도이념으로 정착했다. 삼균주의는 정치와 경제, 교육 균등으로 개인 간 균등을 이루고 나아가 민족과 국가들 사이에도 균등을 이뤄 세계가 한가족이 되자는 이념이다.
조소앙 선생이 직접 쓴 건국강령 초안. 강성만 선임기자
1948년 제헌헌법 경제 조항에 국가의 광범위한 통제를 규정한 진보적이고 선진적인 내용이 들어간 데도 삼균사상과 건국강령이 영향을 미쳤다는 게 학계 중론이다. 제헌헌법 기초위원 유진오는 제헌헌법의 기본 지향을 두고 “국민의 균등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특히 노력하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건국강령과 임정 헌법 등을 토대로 한 제헌헌법에는 토지국유화와 18살 선거권 조항은 비록 빠졌지만, 보통선거와 교육 및 경제 균등 조항이 다 들어 있어요.”(임형진)
건국강령 기념식은 올해가 처음이다. 건국강령을 조명하는 전국 순회 학술대회도 올해 사업회 주도로 처음 열리고 있다. 지난 6월 서울에서 시작해 8월에는 부산에서 했고 올 안으로 전주와 대전, 원주에서도 열 예정이다. “학계에서 그간 건국강령이 많이 인용됐음에도 부끄럽게 기념식 한번 못 했어요. 75년 창립한 삼균학회도 매년 2월에 대한독립선언 기념식과 학술대회를 한차례 여는 데만 힘을 쏟았죠.” 성균관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삼균주의로 석사 논문을 쓰고 2016년부터 3년 동안 제6대 삼균학회장을 지낸 임형진 교수의 말이다. 천도교인인 그는 지금 천도교종학대학원 원장도 맡고 있다. “건국강령은 독립 뒤 민주공화정을 하려고 준비한 대한민국 설계 프로젝트입니다. 임정은 1946년 해방된 나라에서도 한 번 더 건국강령을 공포했어요.”(조인래)
조소앙 삼균사상 바탕 ‘건국강령’
충칭 임시정부 41년 11월28일 공포
독립 후 대한민국 설계 청사진 담겨
토지국유화·18살 선거권·지방자치 등
‘진보적 평가’ 제헌헌법에도 영향
28일 첫 기념식 열고 순회 학술대회
이번 학술대회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조소앙’을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고 여섯 연구자가 ‘조소앙의 헌법사상’과 ‘조소앙 삼균주의 연구현황과 연구과제’ 등을 주제로 발표한다. 조 이사장은 건국강령을 낭독하고, 임 교수는 학술대회 진행을 맡는다.
사업회는 내달 10일 조소앙 글을 묶은 선집 출판기념회도 한다. 김삼웅 전 관장이 편찬위원장을 맡아 1979년에 출판된 조소앙 문집에서 글을 뽑아, 읽기 쉽게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오래 전 낸 문집에 어려운 한자들이 많아 읽기 어려웠고 또 오타도 있어 학술상 오류로까지 이어져 선집을 냈죠.”(조인래) 조 이사장은 “25권 정도로 예상되는 전집 발간이 숙원이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아직 첫발도 못 떼 안타깝다”고도 했다. “독립운동가 중 소앙 선생만큼 학문적 업적이 큰 분도 드문데 아직 전집이 없다니 부끄러운 일이죠.”(임형진)
조 이사장은 이번 대회가 “국민통합과 통일국가 이념을 재정립하는 장이 되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소앙 조부는 일제 강점기 좌우로 갈라진 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려고 삼균주의를 창안했어요. 통일된 조국을 꿈꾸며 1948년 남북협상에도 다녀오셨죠.” 한국 전쟁 때 납북된 조소앙은 현재 북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잠들어 있다. 임 교수는 “남·북을 이을 수 있는 이념으로 삼균주의 이상은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삼균주의가 우리 민족의 상징적 존재인 단군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란다. “조소앙은 삼균주의 기본 이념인 균등을 단군시대 사관으로 전해지는 신지의 비사 중 한 구절인 ‘수미균평위 흥방보태평( 首尾均平位 興邦報太平)’에서 따왔다고 직접 밝혔어요. 머리와 꼬리가 균등하면 모든 곳에서 태평이 이뤄진다는 말이죠. 조소앙은 나라 없을 때 민족의 구심적 구실을 한 단군을 믿은 대종교인들과 함께 활동을 많이 했어요.”
홍익대 도안과를 졸업한 조 이사장이 최근 복원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쇄 문양. 강성만 선임기자
계획을 묻자 임 교수는 “북한과의 연구 공조가 시급하다”고 했다. “조소앙은 북한에 있는 동안 중립화 통일을 위해 노력했어요. 북에서 그런 자료도 찾고 공동 연구를 해야죠.” 그는 이어 “독창적 이데올로기인 삼균주의가 한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 등을 탐색하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했다. “삼균주의는 성리학과 동학을 잇는 우리 고유의 사상이죠.” 조 이사장은 “시대 변화에 발맞춰 젊은 학자들이 학회에 많이 참여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젊은이들이 참가하는 전국 순회 토크 콘서트를 열어 소앙 조부 등 독립운동가의 삶을 경쾌하고 재밌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