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저녁 아름다운 재단에서 허진이 캠페이너가 온라인으로 진행한 ‘열여덟 어른 투자설명회’ 아름다운재단 제공
허진이(26)씨는 2015년 3월 부산의 보육원 정문을 나왔다. 손꼽아 기다렸던 퇴소날이었지만 매달 1~2명씩 퇴소가 이루어지는 보육원에서는 새삼스러울 게 없는 일이다. “저 이제 가볼게요.” “그래 잘 지내.” 별다른 축하도 응원도 없이 19년 보육원 생활이 끝났다. 단출한 짐이 담긴 캐리어를 끌고 허진이씨는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이제는 밤 9시 취침시간도, 주말만 이용 가능한 스마트폰 사용 제한도, 일일이 보고해야 하는 외출 절차도 없다는 해방감이 느껴졌지만 미래를 오롯이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이 밀려왔다.
올해로 자립 7년 차가 된 허씨는 2018년 대학을 졸업했고 이듬해 결혼했다. 전공을 살려 사회복지사가 됐고, 지금은 아름다운재단에서 보호종료아동을 지원하는 ‘열여덟 어른’ 캠페이너로 활동 중이다. 허씨를 비롯해 많은 보호종료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내며 열여덟살이 되면 자립정착금 500만원과 함께 내쫓기듯 홀로서기를 강요받는 보호종료아동의 삶이 세상에 알려졌다. 지난 7월13일 정부는 ‘보호종료아동 자립지원 제도개선안’을 발표하고 기존 18살에서 24살까지 보호기간을 연장하고 월 30만원의 자립수당을 29살까지 받을 수 있게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들에게 세상은 만만치 않다. 24일 아름다운재단이 지난 8~15일 보호종료 당사자 11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보면, 이들이 느끼는 막막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회로 나온 보호종료아동이 처음 마주하는 고충은 생활고다. 설문조사에서 퇴소 뒤 겪는 어려움에 대해 응답자(중복응답)들은 집구하기(87명), 생활비 불안(84명), 자립정착금 부족(83명)을 꼽았다. 허씨 역시 “자립 초기 생활비가 가장 막막했다. 친구들에게 돈을 많이 빌렸다. 나중에 자립정착금 500만원을 받아 300만원은 등록금으로 쓰고 200만원으로 빚을 갚았는데도 부족했다”고 말했다.
정부의 ‘자립수당 지급기간 확대’ 정책은 응답자 대다수가 ‘당사자의 입장이 잘 반영된 개선안’으로 꼽았다. 다만 응답자들은 경제적 지원 확대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보육원을 막 벗어난 보호종료아동들은 억눌렸던 욕구를 해소하는 데 자립정착금 같은 큰돈을 쓰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이들은 경제적 지원이 실제 자립 정착을 위해 쓰일 수 있도록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허씨는 “보육원에서 월 3만원을 용돈으로 받아 생활했다. 그러다 퇴소 후 갑자기 500만원이 주어지자, 먹고 싶었던 것, 사고 싶었던 것에 있는 대로 다 썼다”고 털어놨다.
설문조사에 응답한 보호종료 당사자들은 ‘심리적 어려움(79명)’과 ‘직업 구하기의 막막함(78명)’도 꼽았다. 한 응답자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 성인이 되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데 남들이 모를 고충이 있다. 전문인력이 도움을 준다면 훨씬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허씨는 “보육원 안에서는 외부 세계와 교류가 힘들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해 칭찬을 듣거나 인정받기도 힘들다. 직업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허씨는 지난 18일 자신의 자립 이야기를 ‘투자설명회’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자립에 필요한 것은 ‘잘 살고자 하는 의지’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이 의지가 개인의 역량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사회적 지원들이 제가 좌절하지 않게 힘이 돼줬어요.”
18일 저녁 아름다운 재단에서 허진이 캠페이너가 온라인으로 진행한 ‘열여덟 어른 투자설명회’ 아름다운재단 제공
박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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