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법정에는 창이 없다. 환한 빛이 드는 법정은 영화와 드라마에만 존재한다. 외부와 차단된 이 공간에서 매일 수많은 이들의 한숨과 환호가 교차한다. 몇 줄 판결문에 평탄했던 삶이 크게 출렁이기도 하고, 스스로 어쩌지 못했던 누군가의 삶은 전환점을 맞기도 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재판은 우리 이웃을 한 뼘 더 이해할 수 있는 가늠자다. 평범한 이들의 재판이 열리는 법정에 작은 창을 내려는 이유다.
그릇된 복수심은 범죄로 이어졌다. 21살 대학생 ㄱ씨는 2년 동안 사귀다 헤어진 여자친구 ㄴ씨 이름으로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다. 2018년 12월의 일이다. 그는 이 가짜 계정(사칭계)에 여러 사진을 올렸다. ㄴ씨를 불법촬영한 사진과 사귈 때 찍어둔 평범한 사진 등이었다. 성매매를 암시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ㄱ씨는 ㄴ씨의 여동생도 겨냥했다. 여동생 얼굴이 나온 사진과 함께 성매매 암시글을 올렸다. ㄴ씨와 그 가족들이 게시물을 내려달라고 했지만, ㄱ씨는 듣지 않았다. 그는 반복해서 글과 사진을 올렸다. 범행은 지난해 3월까지 이어졌다. 그의 빗나간 복수심은 두 여성과 그 가족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ㄱ씨는 기소됐다.
지난 10월 말, ㄱ씨는 변호인과 함께 법정에 들어섰다. 그의 어머니는 피고인석에 앉은 아들을 방청석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검사는 ㄱ씨의 공소사실을 낭독했다. “피고인은 2년간 교제하고 헤어진 피해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피해자의 이름으로 사칭한 트위터 계정을 개설했습니다. 피해자를 비방할 목적으로 교제 중 보유하고 있던 피해자의 사진과 음란한 사진, 문언을 게시해 마치 피해자가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고 성을 매매하는 것처럼 공공연하게 거짓 사실을 써서 명예를 훼손했습니다.”
검찰이 그에게 적용한 혐의는 명예훼손이었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불법촬영’ 혐의를 적용할 여지도 있는 범죄사실이지만, 검찰은 범죄 행위 당시를 기준으로 형량이 더 높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명예훼손)으로 그를 재판에 넘겼다. ㄱ씨는 이날 자신의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ㄱ씨가 저지른 범죄는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우리 주변의 누구도 그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얘기다.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법조인과 활동가들은 트위터와 텀블러, 인스타그램 같은 온라인 플랫폼에 이런 식의 ‘사칭계정’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입을 모은다. 과거 교제했던 연인의 사진을 모욕적인 문구와 함께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간에 악의적으로 올리는 이들이 많지만, 그 규모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사칭계정의 게시물이 피해자에게 직접 전달되는 것이 아니어서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 수 없는 경우도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에스엔에스(SNS)에 전체 공개한 사진이 누군가에 의해 사칭계정에 악용되는 사례를 포함하면 그 규모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날 검사는 ㄱ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피해자와 가족들이 트위터 글을 삭제해달라고 했는데도 반복적으로 행위를 한 점, 피고인의 행위로 피해자는 돌이킬 수 없는 정신적 피해를 받은 점을 고려했다”는 것이 검찰 쪽 설명이었다.
ㄱ씨는 최후진술에서 반성의 뜻을 내비쳤다. “정말 많이 반성했습니다. 뉴스에서 (내가 저지른 일과) 비슷한 사건 기사를 접할 때마다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이 생각났고 크나큰 상처를 줬다는 점에 대해서 정말 사죄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사건을 겪으며 스스로가 어리고 미성숙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 방청석에 와 계시는 어머니께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서 죄송합니다.” 방청석에서 아들의 말을 듣던 어머니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이날 재판이 끝나자, ㄱ씨 어머니는 돌변했다. 검사가 실형을 구형한 것을 두고 법정 밖에서 변호인에게 크게 항의한 것이다. ‘형량을 줄이려면 이제라도 변호인이 나서 판·검사들의 성향을 파악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 달 뒤 열린 선고 공판에서 1심 재판부는 ㄱ씨에게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범행 경위와 내용을 보면 죄질이 좋지 않고 피해자는 심한 수치심과 모욕감 등 정신적 충격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피고인은 피해자로부터 용서받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진심으로 반성하고 뉘우친다고 말했던 ㄱ씨는 실형이 선고된 바로 다음 날 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그가 법정에서 반성하고 사죄하고 싶다고 한 말들은 문득 공허해 보였다.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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