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8일 오후 서울 동작구 흑석동 아파트 건설현장. 점심을 마친 한 노동자를 식수통을 들고 현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폭우·폭염 등 극심하고 잦은 온도 변화에 우리 같은 야외 노동자들은 그대로 노출돼 있습니다. 아무리 덥고 미세먼지 정도가 심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걸 견디면서 물건을 최대한 빨리 배송해야 해요.”(대형마트 배송기사 이수암씨)
기후위기는 야외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지난 1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 인권교육센터에서 열린 ‘기후위기와 인권 관련 실태조사 결과발표 및 토론회’에 참석한 마트 배송·건설 노동자, 농민들은 ‘기후위기가 인권을 침해한다’고 입을 모았다.
대형마트 배송기사 이수암씨(마트산업노조 온라인 배송지회 지회장)는 “우리는 기후위기로 혹한이 와도, 태풍이 몰아쳐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인권 사각지대’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형마트는 기후가 어찌됐든 ‘무조건 빨리 배송하라’고 압박한다.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전부 배송기사 책임이다. 호우주의보가 내려지면 고속도로 차량 통행량을 20~30% 감축하는 것처럼, 폭우나 폭설이 내리면 배송 물량을 일정 정도 줄이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후위기 피해를 온몸으로 겪고 있는 야외 노동자들은 “정부의 구체적인 대책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30년 넘게 건설현장에서 일한 건설 노동자 복기수씨(건설노조 경기중서부건설지부 타설팀장)는 “기후위기로 갈수록 폭우·폭설이 심해진다. 올여름에는 폭염으로 현장 사망 사고도 있었다”며 “건설노동자는 기후위기로 직접 피해받는 산업 종사자 중 하나다”고 토로했다. 그는 “악천후로 인해 작업을 못 하게 되면 건설사는 이미 정해놓은 공사기간에 작업을 마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강압적으로 작업을 시키고, 이는 곧 사고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복씨는 악천후로 인한 건설노동자의 피해를 막는 제도적 개선책이 있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계속 늘어나는 이상기후 일수를 고려해 공사기간을 연장하고, ‘악천후 수당’(악천후에 따라 축소된 작업시간 및 작업 일수에 대한 수당을 발주금액 등에 반영) 도입 법제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악천후 수당을 법제화한다면, 건설현장에서의 인명 사고도 줄고 건설 노동자들이 보다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농민들은 기후위기를 가장 먼저 체감하고, 가장 큰 피해를 받고 있다. 토론회에 참석한 박흥식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이날 태풍과 수해로 지붕이 날아간 자신의 농가와 벼들이 누운 들판 사진을 보여주며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농민들이 보고 있다. 기후위기로 인한 자연재해로 수확량도 줄고, 한번 재해가 발생하면 피해 금액도 어마어마한데, 우리가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금액은 쥐꼬리만 하다”고 말했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은 많은 이들이 공감하지만, 기후위기가 실제 노동자들의 삶과 인권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은 낮은 편이다. 인권위가 1500명(일반시민 500명·청소년 600명·농어업인 200명·야외 노동자 200명) 대상으로 설문 조사해 이날 발표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93.7%가 “기후위기가 심각하다”고 응답했지만, 기후위기가 인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52.1%가 “인지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인권위는 지난해 12월 “기후위기가 건강권·생명권·자기결정권 등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인권·환경단체의 진정을 받아 일반시민과 농업인, 야외 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지난 6~9월 ‘기후위기와 인권에 관한 인식과 국내외 정책 동향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이번 조사를 시작으로 인권위는 기후취약계층의 인권 침해 문제를 중장기적으로 다룰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지영 기자
jy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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