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지갑에 잘못 들어온 남의 비트코인을 돌려주지 않고 자신의 계좌로 이체했더라도 배임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첫 판결이 나왔다. 원래 주인과 돌려주지 않은 사람 사이에 ‘신임관계’를 인정할 수 없어, 배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다만 이 경우 원래 주인은 상대방에게 민사상 부당이득반환 소송을 내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16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의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ㄱ씨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수원고법으로 돌려보냈다.
ㄱ씨는 2018년 6월 알 수 없는 경위로 그리스인 ㄴ씨의 가상지갑에 있던 199.999 비트코인을 자신의 가상화폐 계정으로 이체 받아 보관하게 됐다. ㄱ씨는 이체 받은 비트코인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았지만, 어떤 경위로 들어왔는지 몰랐다. 이후 ㄱ씨는 본인의 다른 계정 2곳으로 14억8723만원 상당의 199.994비트코인을 이체했다. 검찰은 ㄱ씨를 횡령과 배임 혐의로 기소했다.
1·2심은 횡령죄는 무죄, 배임죄는 유죄로 판단해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법률상 원인없이 돈을 이체 받은 사람은 그 돈을 반환할 의무가 있으므로 이체된 돈을 보관해야하고, 이는 가상자산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가상자산도 경제적 가치를 갖는 재산으로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가상자산도 법정화폐와 같이 재산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잘못 이체된 비트코인이라하더라도 ㄱ씨가 이를 보관할 의무가 있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ㄱ씨가 법률상 원인 없이 ㄴ씨 소유 비트코인을 보관하게 된 이상, 이를 ㄴ씨에게 반환해야 한다”며 “ㄱ씨에게 ㄴ씨의 재산을 보호하고 관리할 임무를 부담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 ㄱ씨는 배임죄 주체로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의 지위에 있다”고 했다. 이어 “비트코인은 횡령죄에서 말하는 ‘재물’이 아니므로, 횡령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대법원은 원심과 달리 ㄱ씨에게 배임죄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형법상 가상자산과 법정화폐는 다르므로, 가상자산을 법정화폐처럼 보호할 필요는 없다는 취지다. 이에따라 ㄱ씨가 잘못 이체된 비트코인을 보관할 의무가 없고, 배임죄의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횡령죄 부분은 검사가 상고하지 않아 따로 판단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배임죄 성립 요건인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는 신임관계에 기초해 타인의 재산을 보호하거나 관리하는 데 있어야 한다”며 “이 사건처럼 알 수 없는 경위로 가상자산을 이체 받은 경우엔 ㄴ씨와 ㄱ씨 사이 신임관계를 인정하기 쉽지 않다. ㄱ씨를 ‘타인의 사무를 처리리하는 자’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가상자산은 법정화폐에 준하는 규제가 이뤄지지 않는 등 법정화폐와 동일하게 취급되고 있지 않고, 거래에 위험이 수반돼 형법을 적용해 법정화폐와 동일하게 보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상자산을 이체 받은 자가 이를 사용·처분할 때 처벌하는 법 규정이 없는 상황에서 ㄱ씨를 배임죄로 처벌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에 반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대법원은 “착오로 가상자산이 이체된 경우, 가상자산을 이체 받은 사람은 원래 주인에게 민사상 부당이득반환의무를 부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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