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위 사진부터 전두환과 같은 날 세상 뜬 5·18부상자 이광영씨의 묘소, 특성화고 홍정운군이 현장실습 중 무리한 노동으로 숨진 전남 여수시 웅천동 요트 선착장 앞, 교제살인으로 숨진 황예진씨의 방, 생활고 중에도 직원 월급 챙기고 세상을 등진 ㄱ씨가 운영하던 서울 마포구 염리동맥줏집 앞. 사진 가운데 밝힌 작은 초는 이들을 추모하는 마음을 뜻한다. 광주·여수/백소아 기자
시간이 길이라면 우리는 끝 모를 오르막을 오르는 중인 듯합니다. 올 한해 여러분의 길은 어떤 모양이었나요. 한 해의 끝을 앞두고 잠시 멈춰 뒤를 보니 울퉁불퉁 길목에 빈자리가 보입니다. 참혹한 광주학살의 트라우마로 세상을 등진 이광영(68) 씨(맨 위부터),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현장 실습을 하다 숨진 특성화고 홍정운 군, 교제살해 사건의 피해자 황예진씨. 코로나 장기화로 인한 경영난과 생활고에 스스로 세상을 떠난 마포 맥줏집 사장님과 코로나19 사망자까지…. 그들이 떠난 자리에 추모의 마음을 담아 작은 초를 켰습니다. 그곳에서는 외롭지 않도록. 이들뿐 아니라 고된 삶에 스스로 세상을 등진 이들과 부당하고 억울한 재난과 사건의 피해자로 숨진 이들까지, 그 빈자리를 기억하겠습니다.
#빈자리 하나: 전두환과 같은 날 세상 뜬 5·18부상자 이광영씨
지난 16일 광주광역시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 제2묘역 이광영씨 무덤 앞. 광주/백소아 기자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하반신 장애를 얻은 이광영씨는 40년 동안 후유증에 시달리다 지난 11월 23일 새벽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그는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에 출석하고, 2019년 전두환의 사자명예훼손 사건 1신 공판에 첫 증인으로 서는 등 5.18 진상규명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5.18에 원한도 없으려니와 작은 서운함들은 다 묻고 가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오로지 통증에 시달리다 결국은 내가 지고 떠나간다. 아버지께 가고 싶다'
석줄짜리 유서에서는 그가 오롯이 견뎌야 했던 고통을 가늠할 수 없다. 같은 날 오전 전두환은 사과 한마디 없이 세상을 떠났다.
#빈자리 둘: 현장실습 중 무리한 노동으로 숨진 특성화고 홍정운군
지난 15일 특성화고 홍정운군의 사고현장인 전남 여수시 웅천동 요트 선착장 앞. 여수/백소아 기자
특성화고 3학년 홍정운군은 지난 10월 6일 오전 10시 40분께 전남 여수시 웅천동 요트 선착장에서 현장실습 중 바다에 빠져 숨졌다. 잠수 자격증도 경력도 없는 홍 군은 사업주의 지시로 잠수 장비를 입은 채 홀로 요트 바닥에 붙은 조개, 따개비 등을 긁어 제거하는 작업을 하던 중 사고를 당했다. 현장실습은 선도기업과 참여기업으로 나뉘는데 선도기업은 교육청에서 심의하고 노무사의 현장실사를 거친 뒤 선정되는 반면, 참여기업은 학교 심의만 거치면 된다. 제대로 된 안전장치나 분업화가 갖춰지지 않은 영세기업들이 현장실습생들의 노동력을 쉽게 취할 수 있다. 해당 업체 또한 참여기업으로 학교는 노무사도 없이 약식협의로 해당 업체에 학생들을 내보냈다. 홍 군의 죽음 이후 79일 만에 대책을 내놓은 교육부는 참여기업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지원을 높여서 더 많은 혜택이 현장실습생들에게 돌아가겠다고 발표했지만 관계자들은 오히려 악용될 수 있는 땜질식 대책이라 규탄했다.
#빈자리 셋: 교제살인으로 희생된 황예진씨
지난 24일 경기도 고 황예진씨의 방. 백소아 기자
황예진씨는 지난 7월25일 서울 마포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남자친구 이아무개씨로부터 폭행당해 숨졌다. 교제살해 사건의 피해자다. 가해자 이씨는 오피스텔 1층 로비, 주차장 언덕 등 수차례 폭행했고, 예진씨가 정신을 잃어도 응급조치도 하지 않았다. 가해자가 ‘술을 많이 마셔서 기절했다’며 119에 허위 신고를 한 뒤 예진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24일 동안 뇌사 상태를 유지하다 8월17일 숨졌다. 예진씨의 죽음은 유가족과 친구들이 청와대 국민청원과 사회관계망서비스에 글을 올리며 알려졌다. 5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슬퍼하고 분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지난 13일 가해자 이아무개씨에게 살인이 아닌 상해치사 혐의로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유가족은 검찰이 살인이 아닌 상해치사로만 넘긴 게 안타깝고 또 다른 예진이가 생기지 않도록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빈자리 넷: 생활고 중에도 직원 월급 챙기고 세상 등진 맥줏집 사장님
지난 26일 서울 마포구 염리동 ㄱ씨가 생전에 운영하던 맥줏집 앞. 백소아 기자
1999년부터 서울 마포에서 맥줏집을 운영했던 ㄱ씨는 지난 9월7일 원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경영난과 생활고에 ㄱ씨는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한 때 요식업 가게를 4개까지 했던 ㄱ씨, 코로나 재난이 길어지면서 매출은 절반에서 3분의 1로 줄었고 영업제한 조치가 강화된 지난해 말부터는 손님이 뚝 끊어졌다고 한다. ㄱ씨는 숨지기 전 남은 직원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 자신이 살고 있던 원룸을 뺐고 지인들에게 빌려 채웠다. 그가 떠난 뒤 텅 빈 가게 앞에는 그를 추모하는 국화와 메시지가 쌓였다.
#그리고 코로나19 희생자들
지난 22일 경기도 고양시 서울시립승화원. 고양/백소아 기자
올 한 해 코로나19로 인해 4000명이 넘는 이들이 세상을 떠났다. 지난 22일 경기도 고양시 서울시립승화원에서 숫자를 마주했다. 해가 뉘엿뉘엿한 오후 4시가 지나가 앰뷸런스들이 속속 승화원 앞 마당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호복을 입은 운전 기사들이 내리자 뒤따라 도착한 유족들은 목례를 건넨 뒤 승화원 건물 안으로 향했다. 어떤 이는 전화를 붙든 채 “아빠가 보고 싶어”라며 울었고 어떤 이들은 서로를 부축한 채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5시가 되자 앰뷸런스는 차례로 승화원 건물 앞으로 향했고 방호복을 입은 승화원 관계자들이 장례절차를 진행했다. 유가족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채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해야 했다.
광주·여수·고양/백소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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