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 여자고등학교에서 군인에게 위문편지를 보내게 한 사실이 알려진 뒤 “생활관에서 스마트폰 사용이 가능한 시대에 여학생 위문 편지가 웬 말이냐”며 황당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논란은 지난 11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 위문편지 한장이 올라오면서 시작됐다. 해당 편지에는 “인생에 시련이 많을 건데 이 정도는 이겨줘야 사나이” “눈 오면 열심히 치우세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 내용을 본 일부 누리꾼들은 “군인에 대한 조롱”이라고 반발했다. 이들은 해당 여고에 찾아갔다며 사진을 인증하거나 편지를 쓴 학생들의 신상 정보를 알아내 유포하고 악성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편지 내용이 아니라 ‘여자 고등학생’들에게만 의무적으로 위문편지를 쓰게 했다는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학생들은 학교가 위문편지와 봉사활동 점수와 연계돼 있어 어쩔 수 없이 썼다고 주장한다. 12일 학생들이 공개한 ‘위문편지 작성에 대한 유의사항’을 보면 “군인의 사기를 저하할 수 있는 내용은 피한다”, “지나치게 저속하지 않은 재미있는 내용도 좋다”, “끝맺음은 ○○여자고등학교 ○학년 ‘드림’이라고 한다”고 돼 있다. 위문편지를 작성해봤다는 한 누리꾼은 “교사가 편지에 향수를 뿌리라고 시켰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또 유의사항에는 “개인정보를 노출하면 심각한 피해를 볼 수 있으니 학번, 성명, 주소, 전화번호 등 정보 기재 금지”라는 내용도 있는데, 학교도 위문편지의 부적절함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22년에도 여학생들이 군인에게 보내는 위문편지가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누리꾼들은 “군대 내 휴대전화 사용도 가능한 시기에 ‘위문편지’가 웬 말인가”, “군생활에 대한 보상을 왜 여고생의 감정노동으로 줘야 하느냐” 등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특히 여고에서만 이루어지는 위문편지 금해주시길 바란다’라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작성자는 “편지를 쓴 학생에게 어떤 위해가 가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위문편지를 써야 한다는 것은 큰 문제”라며 “미성년자에 불과한 여학생들이 성인남성을 위로 한다는 편지를 억지로 쓴다는 것이 얼마나 부적절한지 잘 아실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유경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활동가는 “‘순수하고 어린 여자’가 군인의 사기를 돋우어줘야 한다는 시선을 갖고 여고생들을 기쁨조’로 본 것이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학생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학생들이 이를 거부할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강혜란 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는 “여학생들에게만 위문편지를 쓰도록 강요했다는 것은 여성을 위로나 돌봄의 제공자로, 남성을 수혜자로 간주하는 매우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학생들의 젠더감수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교육 현장의 상황이 조속히 개선되길 바란다”고 했다.
해당 학교에 위문편지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 여러차례 연락을 했으나 닿지 않았다. 학교는 이날 저녁 학교 누리집에 “본교의 위문편지 쓰기 행사와 관련하여 물의가 발생한 것에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2021학년도 위문편지 중 일부의 부적절한 표현으로 인해 행사의 본래 취지와 의미가 심하게 왜곡된 점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방부는 <한겨레>에 “국방부 자체에서 공식적으로 하는 건 없다. 학교랑 교류를 하는 여부는 다 각 부대에서 개별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방혜린 군인권센터 상담지원팀장은 “국방부가 왜 여고와 부대의 자매결연을 용인하게 하는지, 전혀 감독하지 않는지 의문이다. 위문품에 대해서만 엄격하게 관리 그 외의 것들은 너무 무감각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공지한 군 위문편지 작성 유의사항.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이주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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