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93살 항보 선생의 포도나무, 역사, 그리고 지혜

등록 2022-02-13 18:26수정 2022-02-13 19:29

[짬] 항보 김성순 선생

항보 선생이 인터뷰에 앞서 자신이 일군 덕천포도원의 한 포도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고 있다. “미국의 한 포도나무 한 그루는 1년에 포도 8톤을 수확했다고 하더군요.” 그는 내달 내는 문집에는 함평고구마사건 단식 농성 때 자신이 단식 농민들을 대표해 쓴 선언문과 도법 스님이 만드는 잡지에 쓴 기고문 등이 실린다고 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항보 선생이 인터뷰에 앞서 자신이 일군 덕천포도원의 한 포도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고 있다. “미국의 한 포도나무 한 그루는 1년에 포도 8톤을 수확했다고 하더군요.” 그는 내달 내는 문집에는 함평고구마사건 단식 농성 때 자신이 단식 농민들을 대표해 쓴 선언문과 도법 스님이 만드는 잡지에 쓴 기고문 등이 실린다고 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황학산 거북의 꿈’.

올해 만 93살인 항보 김성순 선생이 내달 펴내는 생애 첫 문집 제목이다. 1949년 단독정부 반대 운동을 하다 1년 6개월 옥고를 치렀던 그는 1960년부터 경북 김천에서 포도 농사를 짓고 있다. 한국 포도 재배 농민들이 만든 한국포도회 기관지 <포도> 편집위원장을 1980년 창간 이후 지금껏 맡고 있다. 작년 말 나온 153호를 보니 그가 일본 농업잡지 <현대농업> 최신호를 참고해 쓴 ‘복숭아·자두의 와이(Y)자 정지’란 글도 있다.

“항보 선생의 삶은 개인의 경험을 넘어 우리 근현대사의 살아있는 증언이자 민중의 생생한 역사이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구사일생의 삶을 이어오면서도 언제나 사람답게 사는 바른길을 향해 혼신으로 걸어온 길은 귀중한 역사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황학산 거북의 꿈’ 간행위원장 이병철 전 전국귀농운동본부장의 말이다. “임근수 추풍령중 교장 선생님이 선생의 글을 컴퓨터로 옮겨 정리하고 선생님과 인연이 있는 도법 스님과 나카츠카 아키라 일본 나라여자대 명예교수, 배종렬 전 전농 회장, 이길재 전 가톨릭농민회 회장, 정지창 전 영남대 교수 등이 각각 쓴 ‘내가 본 항보 선생’이라는 글도 문집에 실립니다.”(이병철)

지난 9일 김천 덕천 포도원에서 항보 선생을 만났다.

항보 선생이 1980년부터 편집위원장을 맡아 내는 잡지 &lt;포도&gt; 과월호.
항보 선생이 1980년부터 편집위원장을 맡아 내는 잡지 <포도> 과월호.

“어제 일본인 지인 13명에게 팩스로 일본에서 40만권이나 팔린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사이토 고헤이 저)를 읽은 소감을 써서 보냈어요. 저자 사이토가 마르크스 말년 사상을 생태 소셜리즘으로 읽고 오늘날 기후 위기를 넘어설 대안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협동조합 수백개를 만들어 10년 이상 펼친 상부상조 운동을 소개한 책이죠.”

그는 구순을 넘긴 지금도 돋보기에 기대지 않고 매달 책 2~3권을 통독한단다. “요즘 택배 배달이 여의치 않아 최근에는 김천 꽃동산서점에 책을 4권 주문했어요.” 그가 백사장 같은 하천부지에서 시작한 포도농사로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었던 것도 왕성한 학구열의 도움이 컸단다. “처음 포도 농사를 할 때 리어카에 똥장군 4개를 싣고 4km 거리를 하루 4번씩 왕복했어요. 그때 서울 갈 일이 있으면 명동 근처 고서점을 들러 포도 농법을 다룬 일본 책을 여러 권 사서 봤어요. 일본 책에서 본 포도 품종 묘목을 저자에게 연락을 취해 어렵게 64년에 들여오기도 했죠. 그뒤 내가 키운 그 묘목 값이 꽤 나가 포도밭을 늘리는 데 도움을 봤죠.”

경북 의성군 단밀면이 고향인 그는 해방 직후 대구사범을 수료하고 대구 칠성초 교사로 1년 6개월 근무했다. 1949년 8월 대구에서 대구사범 선배·동기들과 단독정부 반대 유인물을 돌리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한국전쟁 중 재판을 받고 1951년 4월 옥에서 나왔다. 그와 함께 대구형무소에서 전쟁을 맞은 재소자 8100여명 중 3700여명이 경산 코발트 광산 등에서 군·경에 의해 학살당했다. “나는 6·25 났을 때 재판 전이라 미결감에 있었어요. 한 방에 15명이나 돼 칼잠을 잘 정도로 비좁았어요. 전쟁 나고 대낮에 이틀 동안 많은 재소자들이 밖으로 나갔는데 어떤 사람은 이제 넓은 곳으로 간다고 싱글싱글 웃기도 했어요. 제주에서 이감된 무기수나, 목포 등 호남 쪽에서 재판을 받고 옮겨온 사람들이 대부분 희생됐죠. 나와 함께 구속된 대구사범 동창 3명도 구속 뒤 소식이 끊겼어요.”

포도 농사로 기반을 잡아가던 65년에는 현 새마을금고의 모태인 새실마을금고를 세워 2년 동안 키웠고 66~67년에는 새실재건학교를 만들어 돈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아이들 20여명에게 배움의 기회를 베풀었다. 1970년 나온 <씨알의 소리> 창간 독자인 그는 유신 시절 가톨릭 농민회 경북 총무를 맡아 농민 운동에도 앞장섰다. 고 강원용 목사가 만든 크리스찬 아카데미 농촌 분야 교육(9기)을 76년에 받고 이듬해 ‘자주적 농민운동의 씨앗’이라는 평가를 받는 ‘함평 고구마사건’ 단식농성에 참여했으며 79년에는 중앙정보부가 안동가톨릭농민회 회원을 납치해 폭행한 사건에 항의하다 20일 구류 처분을 받았다. “나보다 앞서 철원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던 아동문학가 강정규씨와의 인연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목요 기도회에 나가면서 농민회 활동도 하게 되었죠. 그때 내가 다니던 김천의 한 교회 목사님이 예배 시간에 대놓고 나를 비난한 일도 있어요. 국제적으로 문제가 있는 단체에서 활동한다고요.” 농사로도 바빴을 텐데 어떻게 <씨알의 소리>까지 구독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박정희 유신 독재로 마음이 답답할 때 그 잡지를 보면 마음이 흐뭇했어요. 내가 정면으로 유신에 맞설 수 없는 상황에서 잡지에 실린 시원한 글을 보며 마음으로나마 용기를 얻었죠.” 그는 88~89년에는 한겨레신문 창간 지국장도 지냈다.

항보 선생이 자신의 글이 실린 &lt;씨알의 소리&gt; 79년 2월호를 가리키고 있다. “함석헌 선생은 ‘인생에 종교가 있고, 역사에 종교가 있다’고 했어요. ‘죽은 뒤 천당 가려고 기독교를 믿는 게 말이 되냐. 그놈의 천당이 오늘의 기독교를 망쳤다’고도 하셨죠. ‘한국 기독교가 선 자리’라는 함 선생 글이 너무 좋아 &lt;씨알의 소리&gt; 편집부에 요청해 그 육필 원고를 받아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항보 선생이 자신의 글이 실린 <씨알의 소리> 79년 2월호를 가리키고 있다. “함석헌 선생은 ‘인생에 종교가 있고, 역사에 종교가 있다’고 했어요. ‘죽은 뒤 천당 가려고 기독교를 믿는 게 말이 되냐. 그놈의 천당이 오늘의 기독교를 망쳤다’고도 하셨죠. ‘한국 기독교가 선 자리’라는 함 선생 글이 너무 좋아 <씨알의 소리> 편집부에 요청해 그 육필 원고를 받아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lt;씨알의 소리&gt;에 실린 항보 선생의 글.
<씨알의 소리>에 실린 항보 선생의 글.

대구사범 출신 1949년 ‘단독정부 반대’
한국전쟁 와중 옥살이 ‘구사일생’ 귀촌
경북 김천에서 60년 넘게 포도 농사
올 93살에 첫 문집 ‘황학산 거북의 꿈’

38년간 기독교 신자…2010년 동학으로
“대선 결과만 몰두말고 자기반성부터”

항보 선생은 만 87살인 2016년에 나카츠카 교수가 일본 역사가 야마베 겐타로에 대해 쓴 책 <일본의 조선침략사 연구의 선구자 야마베 겐타로와 현대>(씨알누리)를 직접 번역해 출판하기도 했다. 그와 동갑인 나카츠카 교수는 청일전쟁 등 일제의 조선침략사를 연구한 학자로 일본의 역사 왜곡을 강하게 비판해 ‘일본의 양심’으로 불린다. “2003년 우연히 교보문고에서 나카츠카 선생이 한-일 관계를 다룬 일본어 책을 보고 흥미를 느껴 직접 저자에게 전화 연락을 한 뒤로 친구처럼 지내고 있어요. 나카츠카 선생이 11차례나 꾸린 동학 답사 기행에도 몇 차례 동행했죠.”

1970년부터 38년을 기독교 신자로 산 그는 2010년 동학(천도교)에 입도했다. 2017년 대구 현대백화점 앞에 세운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순도비 건립도 이끌었다. “나카츠카 교수가 쓴 동학 농민전쟁 책을 읽으며 역사적 사건으로서 동학에 관심을 갖다 2008년 김지하 시인의 강의를 듣고 동학사상에 끌렸죠. 김 시인은 동학을 보편적 생명사상이라고 말하더군요. 우리 민족 특유의 민중적 생명 사상을 확고한 중심으로 하고 유교와 불교, 노장사상과 기독교 등의 핵심적인 생명 사상을 창조적으로 통일했다는 생각이죠. 2009년 수운 탄생지인 경주 용담정을 찾아 수운 묘소 앞 산세를 보니 내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다음해 찬물에 목욕하고 입도했죠.”

천도교로 개종했지만 그는 예수나 수운의 말씀은 대동소이하다는 생각이다. “수운은 ‘시천주’라고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있다’고 했고 도마복음(기독교 신약 외경) 3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고 했어요. 하나님이 꼭 초월적인 분만은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하면서 하나님은 초월적이라고만 해요. ‘하나님을 부모님 모시듯 하라’는 동학의 하나님이 기독교보다 이해하기 쉽죠.”

그는 동학 2대 교조 해월의 삼경 사상에서 오늘의 문제를 풀 지혜를 찾았다. “삼경은 하늘과 사람 그리고 만물을 공경하라는 말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렇게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상부상조하면 사람들이 편하게 살 수 있어요. 온몸으로 나부터 이 가르침을 실천하면 오늘날 문제를 풀 길도 열립니다.” 그는 “삼경 사상은 첫째 나부터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반성하자는 가르침이 있다”고도 했다. “셰익스피어 <햄릿>에서 반성 없는 삶은 죽음이라고 했죠. 자기반성이 없으면 모두 죽음입니다. 지금은 정치권을 봐도 너무 자기반성이 없어요. 얼마 전 <한겨레>를 보니 지금 야당이 집권해도 1년을 못 갈 거라고 누가 썼더군요. 단기적인 대선 결과에만 몰두하지 말고 진짜 이 시대의 문제가 뭔지 돌아봐야 합니다.”

‘소나무 잣나무 저마다 푸르고/ 마디마다 얽혀서 한나무로다’. 그가 좋아하는 수운의 시 ‘화결시’ 한 대목이다. 그는 이 구절로 우리 시대의 과제를 풀었다. “나는 이 시구에서 각자 독자성을 살리면서도 건실하게 묶여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읽어요. 바르셀로나처럼 김천 시민들도 지역의 독자성을 살리려고 노력해야죠. 포도 농가들도 농사만 지을 게 아니라 어떤 게 좋은 삶이고 누가 고장을 위해 똑바로 정치할 시장인지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지금 지방자치가 빈 껍데기라 서울 집중이 심해져 부동산 문제로 나라가 허둥대잖아요. 지역도 서울에서 공사비 받아와 몇몇이 뜯어먹고 다시 그 돈 대부분이 서울로 흘러갑니다.”

그는 온전한 지방자치제 실현과 함께 삶의 실상을 바로 보는 교육도 강조했다. “지금 교육은 스카이 대학 보내는 데만 신경 쓰고 있어요. 전교조 교사나 공무원들이 나서 아이들이 좀 더 뿌리 깊게 우리 삶의 실상을 보도록 이끌면 좋겠어요. 김천에서 동학이나 6·25 당시 어떤 일이 있었고 왜 포도밭은 많이 생겼는지, 아이들이 동네를 돌며 알아보도록 해야죠. 2014년 <한겨레> 기사에서 인천 계산여고 학생들이 역사 동아리를 만들어 오키나와도 가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 수요집회에 나가고 후배들에게도 가르쳤다는 내용을 봤어요. 작은 사례이지만 이런 교육이 중요해요. 자기가 뿌리 내린 곳의 인문지리, 역사 산업을 알아야죠.”

항보 선생이 문집에 수록하려고 인터뷰 전날 손으로 쓴 원고.
항보 선생이 문집에 수록하려고 인터뷰 전날 손으로 쓴 원고.

항보 선생의 자필 원고.
항보 선생의 자필 원고.

요즘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도 손자나 증손자가 있지만 우선 젊은이 자신이 목이 말라야 합니다. 자신이 목 마를 때 물 한 잔과 사과 한 알은 우주와 다름 없어요. 부모가 뭘 먼저 주려고 하지 말고 아이들이 ‘똑바로 세상 사는 게 뭘까’ 스스로 묻고 답을 찾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부모가 세상에 대한 비판력이 있어야죠.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농민들도 자기 인생관이 있어야 합니다. 쉬울 것 같지만 어려운 문제이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민주주의 망가질 것 같아서”…서울 도심 거리 메운 10만 촛불 1.

“민주주의 망가질 것 같아서”…서울 도심 거리 메운 10만 촛불

[영상] ‘윤 대통령 거부권’에 지친 시민들의 촛불…“광장 민심 외면 말라” 2.

[영상] ‘윤 대통령 거부권’에 지친 시민들의 촛불…“광장 민심 외면 말라”

‘TV 수신료 통합징수법’ 국회 소위 통과에…KBS 직능단체 “환영” 3.

‘TV 수신료 통합징수법’ 국회 소위 통과에…KBS 직능단체 “환영”

오세훈, 동덕여대 시위에 “기물 파손, 법 위반”…서울시장이 왜? 4.

오세훈, 동덕여대 시위에 “기물 파손, 법 위반”…서울시장이 왜?

음주 측정 거부·이탈 뒤 2주만에 또…만취운전 검사 해임 5.

음주 측정 거부·이탈 뒤 2주만에 또…만취운전 검사 해임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