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항보 김성순 선생
항보 선생이 인터뷰에 앞서 자신이 일군 덕천포도원의 한 포도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고 있다. “미국의 한 포도나무 한 그루는 1년에 포도 8톤을 수확했다고 하더군요.” 그는 내달 내는 문집에는 함평고구마사건 단식 농성 때 자신이 단식 농민들을 대표해 쓴 선언문과 도법 스님이 만드는 잡지에 쓴 기고문 등이 실린다고 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항보 선생이 1980년부터 편집위원장을 맡아 내는 잡지 <포도> 과월호.
항보 선생이 자신의 글이 실린 <씨알의 소리> 79년 2월호를 가리키고 있다. “함석헌 선생은 ‘인생에 종교가 있고, 역사에 종교가 있다’고 했어요. ‘죽은 뒤 천당 가려고 기독교를 믿는 게 말이 되냐. 그놈의 천당이 오늘의 기독교를 망쳤다’고도 하셨죠. ‘한국 기독교가 선 자리’라는 함 선생 글이 너무 좋아 <씨알의 소리> 편집부에 요청해 그 육필 원고를 받아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씨알의 소리>에 실린 항보 선생의 글.
한국전쟁 와중 옥살이 ‘구사일생’ 귀촌
경북 김천에서 60년 넘게 포도 농사
올 93살에 첫 문집 ‘황학산 거북의 꿈’ 38년간 기독교 신자…2010년 동학으로
“대선 결과만 몰두말고 자기반성부터” 항보 선생은 만 87살인 2016년에 나카츠카 교수가 일본 역사가 야마베 겐타로에 대해 쓴 책 <일본의 조선침략사 연구의 선구자 야마베 겐타로와 현대>(씨알누리)를 직접 번역해 출판하기도 했다. 그와 동갑인 나카츠카 교수는 청일전쟁 등 일제의 조선침략사를 연구한 학자로 일본의 역사 왜곡을 강하게 비판해 ‘일본의 양심’으로 불린다. “2003년 우연히 교보문고에서 나카츠카 선생이 한-일 관계를 다룬 일본어 책을 보고 흥미를 느껴 직접 저자에게 전화 연락을 한 뒤로 친구처럼 지내고 있어요. 나카츠카 선생이 11차례나 꾸린 동학 답사 기행에도 몇 차례 동행했죠.” 1970년부터 38년을 기독교 신자로 산 그는 2010년 동학(천도교)에 입도했다. 2017년 대구 현대백화점 앞에 세운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순도비 건립도 이끌었다. “나카츠카 교수가 쓴 동학 농민전쟁 책을 읽으며 역사적 사건으로서 동학에 관심을 갖다 2008년 김지하 시인의 강의를 듣고 동학사상에 끌렸죠. 김 시인은 동학을 보편적 생명사상이라고 말하더군요. 우리 민족 특유의 민중적 생명 사상을 확고한 중심으로 하고 유교와 불교, 노장사상과 기독교 등의 핵심적인 생명 사상을 창조적으로 통일했다는 생각이죠. 2009년 수운 탄생지인 경주 용담정을 찾아 수운 묘소 앞 산세를 보니 내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다음해 찬물에 목욕하고 입도했죠.” 천도교로 개종했지만 그는 예수나 수운의 말씀은 대동소이하다는 생각이다. “수운은 ‘시천주’라고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있다’고 했고 도마복음(기독교 신약 외경) 3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고 했어요. 하나님이 꼭 초월적인 분만은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하면서 하나님은 초월적이라고만 해요. ‘하나님을 부모님 모시듯 하라’는 동학의 하나님이 기독교보다 이해하기 쉽죠.” 그는 동학 2대 교조 해월의 삼경 사상에서 오늘의 문제를 풀 지혜를 찾았다. “삼경은 하늘과 사람 그리고 만물을 공경하라는 말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렇게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상부상조하면 사람들이 편하게 살 수 있어요. 온몸으로 나부터 이 가르침을 실천하면 오늘날 문제를 풀 길도 열립니다.” 그는 “삼경 사상은 첫째 나부터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반성하자는 가르침이 있다”고도 했다. “셰익스피어 <햄릿>에서 반성 없는 삶은 죽음이라고 했죠. 자기반성이 없으면 모두 죽음입니다. 지금은 정치권을 봐도 너무 자기반성이 없어요. 얼마 전 <한겨레>를 보니 지금 야당이 집권해도 1년을 못 갈 거라고 누가 썼더군요. 단기적인 대선 결과에만 몰두하지 말고 진짜 이 시대의 문제가 뭔지 돌아봐야 합니다.” ‘소나무 잣나무 저마다 푸르고/ 마디마다 얽혀서 한나무로다’. 그가 좋아하는 수운의 시 ‘화결시’ 한 대목이다. 그는 이 구절로 우리 시대의 과제를 풀었다. “나는 이 시구에서 각자 독자성을 살리면서도 건실하게 묶여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읽어요. 바르셀로나처럼 김천 시민들도 지역의 독자성을 살리려고 노력해야죠. 포도 농가들도 농사만 지을 게 아니라 어떤 게 좋은 삶이고 누가 고장을 위해 똑바로 정치할 시장인지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지금 지방자치가 빈 껍데기라 서울 집중이 심해져 부동산 문제로 나라가 허둥대잖아요. 지역도 서울에서 공사비 받아와 몇몇이 뜯어먹고 다시 그 돈 대부분이 서울로 흘러갑니다.” 그는 온전한 지방자치제 실현과 함께 삶의 실상을 바로 보는 교육도 강조했다. “지금 교육은 스카이 대학 보내는 데만 신경 쓰고 있어요. 전교조 교사나 공무원들이 나서 아이들이 좀 더 뿌리 깊게 우리 삶의 실상을 보도록 이끌면 좋겠어요. 김천에서 동학이나 6·25 당시 어떤 일이 있었고 왜 포도밭은 많이 생겼는지, 아이들이 동네를 돌며 알아보도록 해야죠. 2014년 <한겨레> 기사에서 인천 계산여고 학생들이 역사 동아리를 만들어 오키나와도 가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 수요집회에 나가고 후배들에게도 가르쳤다는 내용을 봤어요. 작은 사례이지만 이런 교육이 중요해요. 자기가 뿌리 내린 곳의 인문지리, 역사 산업을 알아야죠.”
항보 선생이 문집에 수록하려고 인터뷰 전날 손으로 쓴 원고.
항보 선생의 자필 원고.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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