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여성발전기본법(현재의 양성평등기본법)에서 ‘직장 내 성희롱’이라는 법적 개념이 처음으로 정립된 뒤 27년이 지났다. 예방교육 의무화, 사업주의 처벌 규정 도입 등이 이어졌으나 일터의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공공기관이나 대기업조차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를 위한 안전망과 보호조치를 제때 제대로 가동하지 않고 있다. 피해자들은 신고 뒤 사건 무마 시도나 2차 피해에 맞닥뜨린다. 가해자 대신 자신이 일터와 업무에서 배제될까 두려움을 안은 채 신고를 한다. 개별 사건마다 특수성이 있지만, 피해자의 이같은 우려는 공통이다. <한겨레>는 공공기관, 대기업에서 일어난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을 잇따라 전하고, 사건 처리 과정서 반복되고 있는 2차 피해 등의 실태를 3회에 걸쳐 싣는다.
① 한국건강가정진흥원, 성희롱 사건 2차 가해 의혹
②“상사도, 인사팀도, 고용노동부도 믿지 마세요”
③ 왜 가해자 아닌 피해자가 내몰려야 하나요?
여성가족부 산하 준정부기관인 한국건강가정진흥원(한가원)이 사내 성희롱 사건 발생 뒤 신고를 하려는 피해자를 회유·압박하고, 분리조처도 제대로 취하지 않는 등 2차 피해를 유발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가해자로 지목된 직원은 당시 수습직원으로 평가 뒤 최근 정규직 전환됐다.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한가원의 ㄱ부서에서 일하던 20~30대 여성 직원들은 지난해 10월 말 40대 남성 직원(당시 수습직원) ㄴ씨에게 “연예인 아무개가 ‘밤일’ 잘하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더라” “내가 예전에 친구 권유로 아가씨들을 고용하는 유흥업소에 투자해 동업했다”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ㄴ씨는 수습평가 중인 신입사원이었지만 본인보다 어리거나 직책이 높지 않은 여성 직원에게 성적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고 한다. 언어적 성희롱에 해당하는 사안이었다. ㄴ씨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상사를 폭행했다거나, 업무 지적을 하는 나이 어린 선배에게 어떻게 보복했는지 등도 언급했다고 한다. 듣는 이들은 공포감을 느껴야 했다.
피해자 ㄷ씨 등은 지난해 11월1일 부서의 관리자급에 이 사실을 알렸다. 해당 관리자는 “ㄴ씨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더라” “공식 절차를 밟으면 회사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고, ㄴ씨에게도 신고한 사실이 알려지는데 괜찮겠냐”고 말했다. 피해자들을 회유하거나 압박하는 듯한 발언으로, 현재 사내 감사팀은 ㄷ씨의 신고를 받아 이 관리자를 직장 내 괴롭힘 건으로 조사하고 있다.
김금옥 한가원 이사장의 대응도 석연치 않다. 관리자급에서 사안이 해결되지 않자 ㄷ씨는 지난해 11월11일 김 이사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한겨레>가 입수한 녹취록에 따르면, 김 이사장은 “이 건은 성희롱이라기보단 불편함이다” “잘못하면 ㄴ씨가 집단 따돌림으로 신고할 수도 있다” “친구들끼리도 싸우고 또 화해하지 않냐” 등 사건 무마성으로 들릴 발언을 이어갔다. 김 이사장은 <한겨레>에 “아직 심의위 결정이 나지 않은 사안으로 비밀엄수 원칙 때문에 말씀드릴 수 없다”면서도 “(그런 말을 한) 앞뒤 맥락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이어 “비밀유지서약서를 써놓고 외부에 사건을 알린 이에 대해선 어떻게 처분할지 검토 중”이라고도 말했다. 김 이사장은 제11대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출신이다.
ㄷ씨는 지난해 11월30일 정식으로 신고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신고 뒤 분리조치는 가해자로 지목된 ㄴ씨가 아닌 ㄷ씨를 분리하는 식이었다. 때문에 다른 피해자들은 사건 발생 뒤에도 3개월 동안 ㄴ씨와 같은 공간에서 일해야 했다. 한가원 쪽은 면담·조사 과정에서 부서 내 ㄷ씨 외에도 피해자가 있음을 인지한 터였다. 한가원 쪽은 신고인과 피신고인을 분리했기에 규정대로 조치했다는 입장이다. ㄴ씨는 지난 9일에야 재택근무에 들어가면서 분리조치됐다.
조사 과정 중 ㄴ씨는 직장 내 성희롱의 가해자로 지목받은 상황에서 정규직으로 확정 전환됐다. 조사는 12월 초부터 1월 말까지 이뤄졌는데, 1월25일께 ㄴ씨에 대한 수습평가(정규직 전환 심사)가 진행됐다. 수습직원이 성희롱 사건의 피신고인으로 조사를 받는 중이라면 수습평가를 미루는 등의 조치를 해야 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평가자 가운데 한 명은 ㄴ씨를 옹호하고 ㄷ씨 등에게 2차 피해를 줬다는 이유로 직장 내 괴롭힘 조사를 받고 있는 해당 부서 관리자였다. 한가원 관계자는 “인사지침에 따라 원칙적으로 진행한 것”이라며 “ㄴ씨는 원래 정규직 자리에 채용된 인력이다. 이 경우 수습 기간이 끝난 뒤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않은 사례는 없다”고 해명했다.
지난해 7월 시행된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성폭력방지법) 개정안에 따르면 공공기관장은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사실을 알게 된 경우 ‘지체 없이’ 여가부 장관에게 통보해야 하며, 3개월 안에 재발 방지 대책을 제출해야 한다. 그러나 한가원은 지난해 11월1일 처음 성희롱 사건을 인지하고도 조사가 끝날 무렵인 1월25일에야 여가부에 통보했다. 1월20일 직장인 익명 소통 공간인 블라인드에 관련 글이 올라온 뒤였다. 한가원 내 성희롱 고충심의위원회는 오는 15일 열릴 예정이다.
박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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