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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유전무죄 관행 제동 걸리나

등록 2006-02-18 04:15

대법원 ‘기업범죄 부패전담부 배당 검토’ 의미
재벌·권력형 비리 사건 솜방망이 판결 엄단 의지

“일반 시민이 1억원대 절도를 했다면 무조건 실형을 살리면서, 수백억원대의 회삿돈을 훔친 기업인은 집행유예로 풀어주는 것이 말이 되는 겁니까?”

이용훈 대법원장이 취임 뒤 여러 차례 언급한 이 발언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우리 사법의 오랜 관행과 이에 따른 국민들의 분노를 가장 쉽게 설명하고 있다. 법원은 그동안 일반 형사범, 심지어 생계형 범죄자에 대해서도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처벌을 하면서, 죄질과 피해 규모로 볼 때 그 수백배 이상인 재벌·권력형 비리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구실을 붙여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법원은 여론이 들끓을 때는 처벌을 하는 시늉을 하다가, 세간에 사건이 잊혀지면 다시 솜방망이로 돌아가는 행태를 여러 차례 연출했다.

1999년 1천억대 비자금을 조성하고 세금을 떼어먹은 혐의로 구속 기소돼 1심에서 징역 4년에 300억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은 조양호 전 대한항공 회장의 형량은 이듬해 서울고법에서 ‘집행유예에 벌금 150억원’으로 ‘뚝’ 떨어졌다. 당시 재판부가 밝힌 이유는 “조 회장이 항공산업 발전을 위해 성실하게 일해 왔다”는 것이었다.

법원은 기업인들의 잘못을 덮어주기 위해 ‘과거의 업적’을 동원하는 판결도 마다지 않았다. 4200억원의 사기대출과 회삿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김성필 전 성원토건 회장은 3년 동안이나 도피하다 붙잡혀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항소심에서 1심보다 형량이 절반으로 깎인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외환위기 전까지 서민을 위한 임대아파트를 건설하고, 유치원 목욕탕 등 공익시설을 기부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기업인을 위한 ‘맞춤형’ 판결도 있었다. 불법 대선자금 10억원을 건넨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집행유예형을 선고받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게 항소심은 “엄청난 공적자금이 투입된 대한생명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며 벌금형을 선고했다.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보험사 임원을 맡을 수 없다”는 김 회장의 호소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달 초 나온 두산그룹 총수 일가에 대한 1심 판결은 이런 재벌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의 결정판이었다. 두산그룹 총수 일가는 회삿돈을 개인의 사유재산처럼 주무르고, 수백억원의 비자금을 만들어 흥청망청 생활비 등으로 유용했다.


이 사건은 검찰이 ‘봐주기 비난’을 무릅쓰고 두산그룹 형제들을 모두 불구속 기소한 터라, 법원이 ‘통쾌하게’ 엄단할 수 있을 것이냐는 점에서 국민적 관심이 쏠린 사안이었다. 또 “수사와 재판은 불구속 상태에서 하되, 죄가 인정되면 법정구속한다”는 ‘불구속 재판 원칙’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피고인들의 행위에 대해 모두 유죄를 인정하면서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 판결에 대한 이 대법원장의 강도높은 비판은 이러한 사회적 기대를 저버린 데 대한 지적인 셈이다.

법원의 이런 판결들은 결국 국민들의 사법불신으로 이어졌다. 이용훈 원장 체제의 대법원이 기업범죄를 부패전담 재판부에 배당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양형기준을 마련하는 등 사무직 범죄 엄단을 위한 구체적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이런 뼈저린 반성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대법원장이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법부가 화이트칼라 범죄를 엄단하지 않는 한 우리는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며 판사들을 질타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이 추진 중인 구체적 대책들은 아직은 구상 단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법원 일각에서는 재판과 관련된 대법원장의 잇따른 발언을 ‘재판권 침해’라며 불만을 나타내고 있기도 해, 구체화 단계에서 논란도 예상된다. 그러나 이 대법원장의 의지가 확고한 만큼 큰 방향에서는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는 게 대법원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런 움직임은 현재 서울고법에서 진행 중인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사건과 두산 비자금 항소심 등 재벌 관련 사건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이 대법원장의 이번 발언 등은 누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공정한 법의 잣대를 보고 싶어하는 국민염원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또 그 발언이 부적절하다고 느끼는 판사들 대부분도 발언의 형식을 문제삼고 있을 뿐이지, 그 내용에는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들이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아닌, ‘신뢰받는 사법부 만들기’를 위한 신호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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