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직 소장이 지난 18일 서울 마포의 한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광부 시인’ 성희직(62) 정선진폐상담소장은 왼쪽 손가락 셋이 뭉툭하다. 탄광 회사에서 두 번째로 해고당해 복직 싸움을 하던 1989년 손가락 둘을 단지했고 다른 하나는 2007년 진폐 재해자 권익 보호를 외치며 잘랐다. “손으로 섬세한 일을 할 때 말고는 불편함을 못 느껴요. 왼손은 손톱을 두 개만 깎아도 되니 편하다고 농담도 합니다.”
1986년부터 5년간 채탄 광원으로 일한 그는 시집 <광부의 하늘 >(1991)과 <그대 가슴에 장미꽃 한송이를 >(1994)을 펴낸 시인이기도 하다. 1991년 지방선거 때 진보정당인 민중당 후보로 출마해 소속 정당의 유일한 당선자로 강원도의원 배지를 달았고 3선까지 했다. 도의원이던 1994년에는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를 통해 생면부지의 신장질환자에게 콩팥 하나를 떼어주었다. 헌혈 횟수도 25차례다.
“신장 기증하고 30년 가까이 됐지만 지금도 건강해요. 고등공민학교(중학 과정)만 나오고 여러 면에서 부족한 저를 강원도의원으로 뽑아준 주민들을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장기기증을 했어요. 공직자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자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자는 마음이 컸죠.”
올해로 14년째 광산진폐권익연대 부설 정선진폐상담소를 맡고 있는 성 소장을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한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강원랜드 복지재단 상임이사에서 물러난 2007년부터 진폐 재해자들의 권익 보호에 힘쓰고 있다.
해고 광원이 된 뒤로 지금껏 열 차례 이상 투쟁 현장에서 혈서를 썼다는 성 소장은 지난해도 세 차례나 혈서를 썼단다. 지난 연말에는 강원도청 앞에서 일주일 단식농성도 했다. 올해 만 65살인 그가 다시 광원 작업복을 입고 배수진을 친 이유는 근로복지공단 진폐 심사 때문이다. “근로복지공단에 속한 병원 의사들이 직접 써준 진폐 장해등급 소견이 번번이 공단의 진폐 심사위에서 가로막히고 있어요. 지난해 여름 상담소에 민원이 접수돼 조사해보니 의사 소견을 받고도 장해등급을 받지 못한 노동자가 71명이나 돼요. 3회 이상 거부당한 재해자도 50명이더군요. 이 때문에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해 심폐 기능이 나빠진 사람도 있어요.”
공단 심사로 진폐 장해등급을 받으면 진폐법에 따라 매달 보상연금을 받을 수 있다. 현재 진폐 합병증으로 요양 치료를 받고 있는 2300여명과 재가 진폐재해자 9500여명이 연금을 받고 있다. 재가 진폐재해자들은 뒤늦게 2010년에야 연금 지급 대상에 포함됐다. 성 소장이 단지 등 온몸을 던진 투쟁에 나선 지 3년 만이었다.
그는 “근로복지공단이 산업화 시대의 아픈 상처를 보듬기보다 너무 예산 절감에만 신경 쓰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사 소견과 달리 심사에서 장해등급을 받지 못하는 10명 중 2~3명은 나중에 노무사를 통해 장해 판정을 받아요.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심사위가 노무사 장사를 위해 고무줄 심사를 한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도 해요.”
그는 3년 전 심사 통계를 제시하며 “진폐 심사가 형식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도 했다. “2019년 1만1520명을 대상으로 진폐 심사를 했는데 한 차례 2시간 회의에서 200명 이상을 심사한 게 30회나 됐어요.” 이 문제로 이날 오전 국민권익위를 찾아갔다는 성 소장은 “국민권익위가 바로 현장조사에 나서기로 하는 등 의지를 보였다”며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1986년부터 5년간 채탄 광원 근무
‘광부의 하늘’ 등 시집 2권 낸 시인
복직, 진폐 투쟁 등 손가락 셋 단지
1991년부터 강원도의원도 세차례
14년째 상담소장 맡아 단식농성도
“공단의 불합리한 진폐 심사 항의”
그는 진폐 장해 심사와 함께 진폐 재해자들이 사망할 때 내리는 유족보상 판정이 너무 야박한 점도 문제라고 했다. “사망이 진폐와 직접 관련이 있어야만 유족에게 연금이 승계되는데 이 비율이 채 30%가 안 됩니다. 유족보상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다시 노무사를 통해 소송을 제기하면 20~30%가 승소하더군요. 애초 판정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죠.”
지난 15년 가장 의미 있는 성과를 묻자 성 소장은 ‘재가 진폐재해자 연금 지급’과 함께 ‘진폐등급의 하향 판정을 막아내고, 탄광 근무 10년 이상의 만성폐질환자도 매달 연금을 받도록 제도 개선을 이뤄낸 일’을 꼽았다.
성희직 소장은 1989년과 2007년에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 투쟁을 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화제를 그의 두 차례 단지 투쟁으로 돌려 가족들이 많이 걱정했겠다고 하자 성 소장은 “제 성격이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한다”며 “사회적 약자들은 처절한 투쟁을 하지 않으면 관심을 끌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절박한 몸짓을 해야만 반응이 옵니다. 2007년에도 삭발과 갱목 시위는 물론 30일 단식까지 해도 노동부에서 관심이 없었어요. 그때가 대선을 앞둔 시기라 선거가 끝나면 재가진폐재해자 연금 수령을 위해 그간 들인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 같아 단지라는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성 소장은 자신이 투쟁에 나서 성과가 없었던 적이 별로 없다고도 했다. “열에 일고여덟 번은 성과가 있었죠. 정당한 일을 배수진을 치고 치열하게 한 결과이죠. 탄광에서 5년 일하며 배운 ‘막장 정신’ 덕이 큽니다. 탄광은 제 인생의 가장 좋은 학교였죠. 막장은 물러설 곳이 없어요. 배수진을 칠 수밖에 없죠. 그런 자신감을 지옥과 가장 가까운 탄광에서 배웠어요.”
그가 온몸을 던져 세상과 맞장을 뜨는 데는 1989년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쉼터에서 20일간 지내면서 고 이소선 어머니 등 열사 가족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영향도 있었단다. “열사들은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해결하려고 목숨도 내놓았지만 저는 탄광에서 여러 차례 죽을 위기를 겪고도 운좋게 살아남았어요. 남은 인생은 덤인거죠.”
그는 올 가을께 28년 만에 3집 시집을 낼 계획이다. 광원으로 일하기 전에도 시를 썼느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시가 뭔지도 잘 몰랐어요. 사업에 실패하고 탄광에서 일하니 거기가 지옥이더군요. 채탄을 위해 발파하면 갱 안에 먼지가 자욱해요. 안전등 불빛으로 보면 미세먼지가 워낙 많아 마치 입이 자석처럼 쇳가루를 빨아들일 것 같은 공포가 느껴졌어요. 편하게 일하려면 30분 정도는 기다려야 하지만 마음이 급해 2~3분 만에 곡괭이를 다시 들어요. 도급제라 일한 만큼 벌기 때문이죠. 이런 지옥도 같은 작업환경을 대한민국 시인 누가 경험해봤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죠. 개구멍 같은 곳에서 헐떡거리며 기고, 숨이 막혀 방진 마스크도 벗을 수밖에 없는 처절한 노동환경을 알리고 싶어 서툴지만 시를 쓰게 됐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