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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유튜브에 퍼진 ‘성범죄자’ 누명…피해자가 벌금형을 받았다

등록 2022-02-24 04:59수정 2022-02-25 02:33

[가장 보통의 재판]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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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법정에는 창이 없다. 환한 빛이 드는 법정은 영화와 드라마에만 존재한다. 외부와 차단된 이 공간에서 매일 수많은 이들의 한숨과 환호가 교차한다. 몇 줄 판결문에 평탄했던 삶이 크게 출렁이기도 하고, 스스로 어쩌지 못했던 누군가의 삶은 전환점을 맞기도 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재판은 우리 이웃을 한 뼘 더 이해할 수 있는 가늠자다. 평범한 이들의 재판이 열리는 법정에 작은 창을 내려는 이유다.

지난해 12월 회색 패딩점퍼를 입은 ㄱ(35)씨가 변호인과 함께 법정에 섰다. 죄명은 경범죄처벌법 위반. 경찰을 사칭했다는 혐의였다. 법원이 공판절차 없이 내린 벌금 10만원 약식명령에 불복해 정식재판을 청구하고 법정에 나온 ㄱ씨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경찰은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너무 억울해서 겁만 줄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사건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ㄱ씨는 그해 인터넷에서 ㄴ(39)씨를 알게 됐다. 익명이 주를 이루는 온라인 공간에서 처음 만났지만, 두 사람은 이름과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인터넷 바깥세상에서 한차례 만남을 가졌다. 다음 만남도 기약했다. 그러나 우호적인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생겼고, ㄱ씨가 ㄴ씨에게 전화로 심한 욕설을 한 것을 끝으로 둘의 관계는 끊어졌다. 두 사람은 더는 서로 상관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이어가는 듯했다.

그랬던 ㄱ씨에게 ‘악몽’이 시작된 것은 ㄴ씨가 2019년 유튜브 채널과 티스토리 블로그에 ㄱ씨를 겨냥해 ‘아동성범죄자’라는 허위사실을 퍼뜨렸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다. ㄴ씨는 ㄱ씨 사진, 이름, 전화번호를 사실상 그대로 올리고 ㄱ씨가 아동성범죄자라고 저격했다. 뒤늦게 해당 게시물을 확인한 ㄱ씨가 ㄴ씨에게 항의하자 ㄴ씨는 ‘미안하다. 당시 화가 나서 올린 거였는데 나도 잊어버리고 있었다’며 사과하고 게시물을 삭제했다고 한다. 합의금을 원하면 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ㄱ씨가 정보통신망법의 명예훼손죄로 경찰에 고소하자 ㄴ씨 태도는 달라졌다고 한다. 경찰 조사에서 ㄴ씨는 ‘ㄱ씨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한 유튜브 채널과 블로그는 모두 내 계정이 아니다. ㄱ씨에게 범행을 시인하는 듯한 발언을 한 이유는 ㄱ씨가 계속 전화하고 괴롭혀서 그렇게 얘기했을 뿐’이라는 취지로 범행을 부인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ㄴ씨가 명예훼손성 게시물을 올렸다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 유튜브 운영사 구글과 티스토리 운영사 카카오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았지만, 두 회사는 모두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경찰은 2020년 여름 ‘증거 불충분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고 사건을 종결했다. ㄱ씨가 경찰에 증거물로 제출한 ㄴ씨와의 통화녹음과 명예훼손성 게시물 갈무리는 소용 없었다.

그사이 ㄴ씨 것으로 의심되는 유튜브 계정은 ㄱ씨에 대한 허위사실을 담은 영상을 계속 유포했다. ㄱ씨의 지인이 영상을 보고 놀라 ㄱ씨에게 연락하는 일도 있었다. 참다못한 ㄱ씨는 지난해 6월 “경찰 사이버수사팀”이라며 ㄴ씨에게 전화하고 문자를 보냈다. 악성 게시물을 더는 못 올리게 할 의도였다. 그러나 진짜 경찰서에서 온 연락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ㄴ씨가 ㄱ씨를 고소하면서 ㄱ씨는 도리어 피의자 신세로 경찰 조사를 받고, 경범죄처벌법 위반으로 재판에도 넘겨지게 됐다.

ㄱ씨 변호인이 법정에서 말했다. “피고인은 아동성범죄자라는 심각한 명예훼손을 당하고 수사기관에 수사를 의뢰했다. 그런데 가해자가 범행을 부인했고, 해당 계정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고자 하는 수사관의 노력도 회사 쪽의 거부로 아무 의미가 없게 됐다. 피고인은 계속된 피해를 막고자 했는데, 그것이 경찰 사칭이라고 해서 오히려 강도 높은 수사를 받아야 했다. 벌금형을 선고하는 건 가혹하다.” 변호인은 일정기한이 지나면 전과가 사라지는 ‘선고유예’를 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ㄱ씨가 피고인석에서 일어났다. “제 사진, 주소, 이름, 직업까지 다 기재해서 제가 아동성범죄자라는 동영상을 올렸습니다. 경찰 수사 뒤 더는 안 하겠지 했는데, 계속 유튜브로 저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억울해서 겁만 줄 목적이었지, 그 사람을 제가 어떻게 하려는 목적은 없었습니다.” ㄱ씨의 말은 급했다. 검사는 김씨에게 벌금 10만원을 구형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9일 ㄱ씨에게 벌금 7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범행에 이르게 된 경위 등 제반 양형 조건을 참작했다”고 짧게 양형 이유를 밝혔다. 아동성범죄자라는 악의적 영상에 시달린 ㄱ씨에게 남은 것은 피해보상이 아니라 벌금형이었다. 거짓 유튜브 영상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신민정 기자 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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