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지난해 12월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 영상을 재판에서 증거로 인정한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조항은 헌법에 어긋난다고 결정하면서 보완입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지난해 말 헌법재판소가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의 영상녹화진술을 재판에서 증거로 쓸 수 없다고 결정하면서 미성년 피해자들이 법정에 나가 진술을 하고 반대신문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보완입법을 통해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하면서도 미성년 피해자의 2차 피해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수사단계에서 피해자가 영상진술을 하면 분리된 공간에서 피고인이 반대신문을 하고, 이를 법정 증언으로 대체하는 방식 등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입법 및 정책분석 전문기관인 국회입법조사처는 2월28일 ‘성폭력범죄 미성년 피해자의 영상진술 특례규정 위헌결정과 입법개선과제’ 현안분석 보고서를 내어, 미성년 피해자가 심리적 안정을 느낄 수 있는 공간에서 영상녹화진술을 하고, 이때 별도의 공간에서 피의자나 피고인이 반대신문을 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수사단계에서 이런 방식으로 마련한 영상녹화진술을 법정 증언으로 대체하자는 취지다. 앞서 헌재는 지난해 12월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 영상을 재판에서 증거로 인정한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조항은 헌법에 어긋난다고 결정한 바 있다.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입법조사처는 “미성년 피해자 사건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 보호와 2차 피해 방지를 위한 구체적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다. 미성년 피해자가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에게 여러 번 반복하여 피해 사실을 진술하지 않도록 수사단계에서 피해자의 영상녹화진술 때 피고인이 반대신문을 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예가 유럽인권재판소다. 유럽 40여개 나라를 관할하는 이 재판소는 공판에 앞선 조사과정에서 피고인 쪽 변호인이 간접적으로 질문하는 절차를 보장하고, 이렇게 얻은 진술을 증거로 채택하고 있다. 입법조사처는 “수사단계에서 피의자 또는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하고, 이를 통해 마련한 영상녹화진술을 법정에 제출하는 방식으로 법정 증언을 대체하거나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입법조사처는 또 수사단계에서 미성년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노르웨이의 ‘바르나후스’(아동의 집) 모델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노르웨이는 ‘바르나후스’라는 아동 친화적 공간에서 피해자 영상녹화를 하고, 이 녹화물을 법정 증거로 인정한다. 다만, 피고인은 별도의 장소에서 인터뷰를 지켜볼 수 있고 전문가를 통해 질문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피고인 방어권을 보장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미성년 피해자 보호를 위해 △양방향 폐회로티브이(CCTV) 사용 실시간 증언과 △아동의 영상녹화진술로 법정 내 진술을 대체하고 있다. 아동이 두려움으로 증언이 불가능하거나 공개법정에서 한 진술로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을 가능성이 큰 경우 등에 이런 진술을 인정한다. 영국은 피해자가 법정에서 진술할 수 없는 특정한 사유가 있는 경우 영상녹화 진술을 증거로 제출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도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반대신문권을 인정한다. 진술이 어려운 아동의 경우에는 필요한 증언과 신문 내용, 절차, 환경 등을 미리 정하도록 했다.
헌재 결정으로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들이 법정에 출석해 피해 내용을 직접 증언해야 할 상황에 놓이자, 여성가족부도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여가부는 지난 2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여성폭력방지위원회 성희롱·성폭력분과 전문위원회를 열어, 아동·청소년 성폭력 피해자의 2차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책과 입법 방향 등을 논의했다. 법원 내 연구회인 ‘현대사회와 성범죄 연구회’(회장 오경미 대법관)도 지난 1월10일 판사·검사·변호사·피해자 조력자 등이 참여하는 토론회를 열어, 헌재 결정에 따라 법정에서 반대신문을 마주하게 될 미성년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방안 등을 논의했다.
국회에서 관련 입법이 이뤄지고 있다. 임호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월 ‘19살 미만 성폭력 피해자가 법원에 출석할 때 진술보조인이 반드시 증인 신문에 참여하도록 하고, 공판준비기일이나 공판기일에서 피해자 인격이나 명예가 손상되지 않는 신문 방식을 법원과 검사, 변호사, 진술 조력인이 사전에 협의하도록 한다’는 내용의 성폭력범죄처벌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임 의원은 “헌재 결정에 따라 피고인의 반대신문권 행사를 과도하게 제한하지 않으면서도,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방지하고 두텁게 보호하기 위해 개정안을 발의했다”고 밝혔다.
손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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