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주부인 ㄱ씨는 3~4년 전 우편으로 벌금 고지서를 받았다. 절도 범죄를 저질렀으니, 벌금 50만원을 내라는 법원 명령이었다. ㄱ씨는 당황했다. 물건을 훔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가지 짚이는 일이 있었다. 지인을 통해 알게 된 ㄴ씨에게 휴대전화와 신용카드를 맡긴 적이 있기 때문이다. ㄴ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50만원이면 큰돈도 아닌데, 그냥 벌금을 내고 끝내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사과는 없었다. 하지도 않은 일로 범죄자가 될 수 없었던 ㄱ씨는 2019년 11월 정식재판청구권 회복신청을 했다. 약식명령이 확정돼 정식재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식재판청구권이 회복된 뒤에야 ㄱ씨는 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 재판이 3년째 이어질 것이라고는 당시 ㄱ씨는 생각하지 못했다.
황당한 사건의 시작은 2018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ㄱ씨는 ㄴ씨에게 자신의 휴대전화와 신용카드를 빌려줬다. 당시 미국에서 귀국한 ㄴ씨는 한국에서 당장 쓸 휴대전화와 은행 계좌가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ㄴ씨는 휴대전화와 은행 계좌를 마련했고, ㄱ씨는 자신의 물건을 되돌려 받았다. 그런데 ㄱ씨가 물건을 되돌려 받기에 앞서, ㄴ씨는 서울 동대문의 한 상점에서 130만원짜리 운동화를 훔쳤다. 이 사건을 수사한 서울 중부경찰서는 ㄴ씨가 운동화를 훔친 뒤 현금자동지급기(ATM)에서 신용카드로 돈을 찾은 내역을 확보했다. 이 카드는 ㄱ씨 카드였다. 경찰은 현금 인출 내역을 바탕으로 ㄴ씨가 아닌 ㄱ씨를 절도범으로 특정하고, ㄱ씨 휴대전화로 연락했다. 당시 ㄴ씨는 ㄱ씨 휴대전화도 갖고 있었다. ㄴ씨는 ㄱ씨 행세를 하며 경찰 조사를 받았다. ㄱ씨는 이런 과정을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어느새 이 사건의 범인이 돼 있었다.
ㄴ씨가 ㄱ씨 행세를 한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수사기관의 조처였다. 경찰과 검찰은 피조사인의 신분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경찰은 ㄴ씨를 조사하고 피의자 신문조서를 작성한 뒤, 지문 인식기로 신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ㄴ씨가 “살갗이 아프다”며 제대로 응하지 않자, ㄴ씨 지문을 채취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지문 인식기로 신분이 확인될 경우 자동으로 생성되는 지문 번호를 경찰관이 임의로 수기 입력하고 신분확인을 마쳤다. ㄴ씨가 신분증도 제시하지 않은 터라 경찰이 작성한 조서에는 신분증도 누락돼 있었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도 다르지 않았다. 서울중앙지검은 ㄴ씨의 신분을 추가로 확인하지 않고 2018년 8월 ㄱ씨에 대해 벌금 50만원의 약식명령을 구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은 것이었다.
ㄱ씨는 “사건이 금세 끝날 줄 알았다”고 했다. 자신이 신발을 훔친 것이 아니라는 것만 증명하면 혐의를 벗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문감정이 발목을 잡았다. ㄴ씨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피의자 신문조서에 날인한 지문과 ㄱ씨 지문이 다르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두 차례나 지문감정을 의뢰했지만, 모두 “두 지문이 같다고 볼 수도, 다르다고 볼 수도 없다”는 애매한 답을 받았다. ㄴ씨는 한차례도 증인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다만, 대검찰청의 지문·필적감정은 ㄱ씨에게 유리한 증거였다. 대검은 ‘피신조서 지문은 ㄴ씨 지문과 동일하고, 피신조서 필적은 ㄱ씨 필적과 다르다’고 지난 1월28일 회신했다. ㄱ씨가 절도범이 아니라고 2년 넘게 법정에서 주장한 내용과 부합하는 결론이었다.
지난 10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ㄱ씨 변호인인 손영현 변호사는 “ㄱ씨 이름이 절도 사건에 사용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 확인된 만큼 공소 기각을 구한다”고 말했다. 검찰은 ㄱ씨가 절도범이 아니라는 지문, 필적감정 결과가 나오자 공소취소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 한 번 더 재판을 열 수 있을지 재판부에 물었다. 그러나 ㄱ씨 쪽은 “공소가 취소되면 형사보상신청을 할 수가 없다”며 반대 의견을 냈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 사건을 수사한 서울중부서와 서울중앙지검은 사건과 관련한 <한겨레> 질의에 “선고를 앞두고 있으니 일단 선고 결과를 보겠다”며 특별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ㄱ씨는 최후 진술에서 “본인 확인도 없이 수사와 벌금 청구까지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이 일반 시민 입장에서는 너무 놀라웠다”며 “재판을 하면 금방 밝혀질 줄 알았지만, 절도 사건 발생 뒤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냥 50만원을 내고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지만, 한 아이의 엄마로서 절도 벌금형 전과를 안고 살 수 없다고 생각해 이 시간을 견뎠다”고 말했다. ㄱ씨는 지난 15일 국가인권위원회에 검찰총장과 경찰청장, 서울 중부경찰서장을 상대로 진정도 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피조사자의 신분확인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경위를 파악하도록 하고, 재발방지 대책 등을 마련해달라는 내용이다. 다음 재판은 22일 오후에 열린다.
최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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