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입구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소송 당사자가 주장하지 않은 내용까지 법원이 판단하는 것은 ‘변론주의 원칙’ 위반으로 잘못됐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변론주의 원칙은 당사자가 주장한 것과 증명된 것만으로 재판을 해야 한다는 민사소송의 대원칙으로, 당사자가 주장하지 않은 부분까지 판단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 이번 대법원 판결 취지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ㄱ씨가 한 주택 재개발조합을 상대로 낸 ‘조합장 지위 부존재 확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1일 밝혔다.
2016년 7월 경남 창원 한 재개발조합의 조합장으로 취임한 ㄴ씨는 2018년 7월, 2020년 7월 중임됐다. 그는 조합 정비구역 안에 있는 건물에 2019년 12월 전입신고를 했다. 그러나 조합원 ㄱ씨는 “ㄴ씨가 조합장으로 선임된 이래 계속 정비구역에서 거주하고 있지 않다. 도시정비법상 결격사유에 해당해 조합장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며 조합을 상대로 조합장 지위 부존재 확인 소송을 냈다. 도시정비법 41조 1항은 ‘전문(법 조항 앞 부분)’과 ‘후문(법 조항 뒷 부분)’으로 나뉘는데, 후문에는 ‘조합장으로 선임된 자가 관리처분계획인가를 받을 때까지 정비구역에서 거주해야 한다’는 ‘자격 유지 요건’이 담겨있다. 이 조항 전문에는 ‘정비구역 내 거주자로서 선임일 직전 3년 기간 동안 정비구역 내 거주 기간이 1년 이상인 자를 조합장이 되기 위한 요건으로 둔다’고 돼 있다. ㄱ씨는 후문을 근거로 ㄴ씨의 ‘조합장 자격 유지 요건’을 문제 삼은 것이다.
1심은 ㄱ씨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ㄴ씨가 전입 신고한 뒤 지금까지 별다른 (주소이전 등) 변동이 없어 조합장으로 중임된 뒤부터 현재까지 계속해 이 사건 정비구역 내에 있는 위 주택에서 거주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반면, 2심은 ㄱ씨의 손을 들어줬다. ㄴ씨가 조합장 자격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2심 재판부는 ㄱ씨가 청구했던 ‘자격 유지 요건(후문)’이 아닌 ‘선임 자격 요건(전문)’을 들어 ㄱ씨의 조합장 지위를 문제 삼았다. 재판부는 “ㄴ씨는 2019년 12월 비로소 이 사건 주택에 전입해 정비구역 내 거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선임일 2020년 7월 기준 그 직전 3년 동안 정비구역 내 거주 기간이 1년에 미치지 못해 조합장 자격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변론주의 원칙상 당사자의 주장에 대해서만 판단해야 하는데, 당사자가 주장하지 않은 사항을 판단한 원심 판결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ㄱ씨는 ㄴ씨가 조합장으로 선임된 뒤 정비구역에서 실제 거주하지 않는다며 ‘후문’을 들어 주장을 했지 ‘전문’을 들어 주장하지 않았는데도, 원심은 ‘전문’의 요건을 문제 삼아 ㄱ씨가 주장하지도 않은 사항에 관해 판단했다. 사건을 다시 심리·판단해야 한다”며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전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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