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인배우인 김지연(왼쪽부터), 김우경, 박지영씨가 31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겨레>사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청인 역할을 청인이 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농인 역할을 농인이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최근 영화 <코다>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남우조연상 등을 수상하며, 한국에선 농인 역할을 농인 배우가 연기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31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극단 ‘핸드 스피크’ 소속 농인 배우 김우경(28), 박지영(24), 김지연(28)씨는 ‘그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이들은 <코다>를 계기로 농인을 부정적인 상황에 놓인 대상으로만 그려온 한국의 콘텐츠도 이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보석 통역사가 한국수어와 한국어 통역으로 함께 했다.
<코다>는 부모와 오빠 모두 농인인 가족 속에서 홀로 청인인 주인공 루비가 겪는 혼란과 농인 가족의 일상을 그려낸 영화다. ‘코다(CODA·Child of Deaf Adult)’는 농인 부모에게 태어난 청인 자녀를 뜻한다. 농인으로서 청인 코다 언니를 가진 배우 겸 연출가 김지연씨에겐 이 영화는 마치 자신의 이야기 같았다. 김지연씨는 “영화에서 주인공 루비가 성적인 문제로 병원을 찾은 부모에게 의사의 말을 통역해주며 난감해하는 상황이 나오는 데 어릴 때 언니, 어머니와 함께 산부인과를 갔을 때가 생각났다. 간호사가 유치원생인 언니에게 전문적인 용어를 말하며 어머니의 증상을 통역해달라고 하자 엄마는 왜 아이에게 통역을 강요하냐고 화를 내고, 언니는 화내는 엄마가 무서워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농인배우인 김우경씨가 31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겨레>사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특히 영화가 농인 캐릭터를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자연스럽게 비췄다는 이야기에 이르자 세 사람의 손은 부지런히 움직였고, 얼굴은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김지연씨는 “한국에서는 농인 역할을 신파의 소재로 소비하기만 한다. 가령 주인공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이유가 농인 부모를 가졌기 때문이고, 나중엔 농인 부모와 화해하는 식이다”라며 “반면 영화는 그저 농인의 삶을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우경씨는 “한국 영화에서 청인배우가 농인 역할을 맡아 하는 수화는 농인으로선 일부러 농인을 모자라게 보이게 하는 것 같아 모욕감을 느낄 때가 있었는데, <코다>에서는 농인들의 자연스러운 수어 연기를 보며 정말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대화는 열악한 국내 농인 예술계의 현실로 연결됐다. 농학교에 연기 전공을 설치해 전문 농인 배우를 키워내고, 농인 극단이 활성화된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농인 배우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다. <코다>에서 주인공의 아버지역으로 남우조연상을 받은 트로이 코처는 미국의 농인 극단 ‘데프 웨스트(Deaf West Theatre)’에서 활동하며 성장했다. 박지영씨는 “10여년 전 미국에 갔을 때 농인 배우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당시 미국에는 이미 농인 배우가 많고, 그게 당연했다. 농인 대학엔 연기 전공도 설치되어 있다”며 “미국과 달리 한국엔 청인 중심 연기 이론밖에 배울 수 없어 우리가 연기를 시작할 때도 소속된 ‘핸드스피크’ 극단에서 스스로 배우며 시작해야 했다”고 말했다.
농인배우인 박지영씨가 31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겨레>사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영화 밖, 장애인에게 여전히 만만치 않은 현실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레 나왔다. 배우이자 공동체의 구성원인 시민으로서 이들은 때때로 ‘나는 한국인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코다>에서 보여준 농인 배우들의 활약보단 시상에 나서 수어를 선보인 배우 윤여정씨에 더 초점을 맞춘 한국 언론에 서운하다고도 했다. 최근 정치권에서 계속되는 장애 혐오 논란도 이들에겐 상처다. 박지영씨는 “2022년인 지금 아직도 장애인 혐오가 공공연히 발화되고 있다는 게 부끄럽다. 우리나라를 선진국이라고 보기도 아직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김우경씨는 “그들이 장애인이 됐을 때, 이 위치에 놓일 때 얼마나 후회하려고 혐오를 일삼는지 모르겠다”며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려면) 장애인의 날에 더해 ‘예비 장애인’의 날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이들은 언젠가 ‘농인’이라는 수식어를 떼고 ‘배우’로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을 꿈꾼다. 수어가 청인 중심의 언어체계와 예술을 다채롭게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김우경씨는 “<건축학개론>에서 조정석 배우가 키스를 손동작으로 표현한 장면을 보며 농인 배우 사이에선 농담조로 ‘저게 뭐야 우린 더 잘 표현할 수 있어’라고 했다. 우린 소리 없이 수어로 좀 더 화려하게 표현할 수 있다”며 “제 무덤에 ‘배우 김우경’이라고 적히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박지영씨는 “어떠한 내용이든 청인 관객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사실 수어가 가미되면서 더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지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세 명의 배우들은 앞으로도 수어 뮤지컬, 수어 랩, 수어 연극 등 다양한 수어 문화예술콘텐츠를 만들 예정이다. ‘농인예술학교’를 세우는 것도 이들의 꿈이다.
농인배우인 김지연씨가 31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겨레>사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이들이 활동하는 ‘핸드스피크’는?
이들이 활동하는 극단은 ‘핸드스피크’라는 예비 사회적기업이다. 핸드스피크는 농인 배우 18명과 댄스팀, 극단, 영상미디어팀, 디자인 총 26명이 모여 수어뮤직비디오, 수어연극, 수어뮤지컬 등을 수어문화예술컨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농인 아티스트들이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주체적으로 제작을 한다. 이들은 지난 2019년 뮤지컬 ‘미세먼지’를 서울 대학로에서 공연한 데 이어 2020년엔 연극 ‘사라지는 사람들’을 온라인 공연으로 선보였다. 이들은 오는 4월19~20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사라지는 사람들’ 대면 공연을 앞두고 있다. 정정윤 핸드스피크 대표는 “지난 2019년 프랑스에서 열린 ‘2019 세계농축제(Festival Clin d’Oeil)에 언론인 자격으로 참가해 다른 농인들의 연기와 뮤지컬 등을 보니 우리 핸드스피크 배우들의 수준이 오히려 더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아카데미 남우 조연상을 수상한) 트로이 코처의 다음 차례는 핸드스피크 소속 배우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바로가기:
‘코다’, 아카데미 작품상 등 3관왕…장애인·소수자에 대한 관심 확인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36503.html
고병찬 기자
ki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