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희생자 유족인 한동근씨가 손주들과 함께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각명비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인사하고 있다.
“저분이 너희들 증조할아버지야. 자 두 손을 모으고 인사해.”
3일 오전 제주시 제주4·3평화공원 안 마을별로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각명비 앞에서 한동근(78)씨가 손자·손녀의 손을 잡고 한참 동안 헤매다가 4·3 당시 희생된 아버지(한온공·당시 38)의 이름을 찾았다. 한씨가 “얘들아, 이 분이 할아버지의 아빠야. 너희들 증조할아버지란다”며 인사하도록 했다. 승수(12·초5)군과 가온(10·초3)양 자매는 할아버지의 말에 따라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승수군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돌아가신 것을 보니 슬퍼요”라고 했다. 세 살 때 아버지가 동생(한이공·당시 20)과 끌려간 뒤 1948년 12월21일 제주시 박성내에서 희생됐다. 한씨는 “아버지 얼굴도 기억에 나지 않지만, 어머니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며 “해마다 손주들과 4·3공원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4·3행방불명인 표석에서 유족 김정옥(79·오른쪽)씨가 아버지의 표석앞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한라산에 잔설이 있고, 목련과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따뜻한 봄날의 추념식이었다. 올해부터는 4·3 희생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도 시작되는 만큼 4·3 추념식 의미가 남달랐다. 4·3평화공원에서 만난 유족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3번이나 추념식에 참석하고, 올해도 따뜻한 추념식 메시지를 준 데 대해 고마움을 느낀다”며 “올해부터는 보상금 지급도 이뤄지게 감개무량하다. 오늘 같은 봄날이 유족들에게 이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각명비와 위패봉안실, 행방불명인 표석에는 유족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곳에서 만난 김성여(76)씨는 남편의 형인 큰시아버지(한흥수·당시 17)를 찾아왔다. 김씨는 “시어머니가 생전에 ‘너무 억울하다’는 말을 자주하면서 4·3이야기를 들어서 알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큰시아버지가 회천마을에서 신촌마을에 있던 어머니를 만나러 내려오다가 잡혀가 1948년 12월28일 신촌초등학교에서 희생됐다. 총을 맞아도 일어나서 ‘대한민국 만세’를 3번이나 외치고 죽었다”고 말했다.
4·3 유족들이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석에서 제를 지낸 뒤 돌아가고 있다.
행방불명된 아버지(김학수·36)의 표지석 앞에서 제를 지내고 음복을 하던 김정옥(79·제주시 한림)씨는 “이렇게 해마다 4·3추념식 때 공원에 왔다 가면 재수가 좋다”며 웃었다. 마을 친구들과 왔다는 김씨는 친구들도 모두 4·3유족이었다. 조부모와 아버지, 오빠 등을 잃은 김씨는 이날 표석에 올린 술잔만도 9개였다.
옆에 있던 고정자(81) 씨는 고모와 작은 시아버지가 4·3 때 희생됐다며 말을 이었다. 고씨는 “시집온 지 사흘 만에 꿈에 어떤 남자가 나타나 머리맡에 서 있었다. 시이모한테 그 꿈 이야기를 하니 ‘네 작은 시아버지가 물을 얻어먹으려고 나타났다’고 하더라”며 그때 이후 지금껏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했다.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이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위령제단 앞에서 봉행된 가운데 통제선으로 막아버리자 유족들이 들어가지 못한 채 밖에서 추념식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의 방문에 유족들은 박수를 치거나 환영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오임종 제주4·3유족회장은 “윤 당선자가 4·3추념식에 참석해 영령을 추모하겠다는 약속을 지켜줘 감사드린다”며 “후보 때 약속하신 4·3 해결 공약을 인수위원회에서 국정과제로 채택해 해결해 줬으면 한다.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 국민통합의 시대를 여는 대통령이 돼 달라”고 요청했다. 제주4·3연구소도 “보수 정당 출신 대통령 당선자가 4·3추념식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다. 4·3 문제 해결에 진정성을 갖고 추진해 주기를 요청한다”고 말했다. 먼발치에서 추념식 광경을 지켜보던 유족 김아무개(79)씨도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이오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대통령 당선자가 참석한 것은 고마운 일이다. 선거 과정에서 있었던 4·3 공약이 지켜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추념식에 참석하지 못한 유족들이 통제선 밖에 앉아있거나 먼발치에서 추념식 광경을 지켜보는 등 서성거리고 있다.
그러나 이날 4·3추념식 참석 인원을 299명으로 제한해 과도하게 제한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왔다. 일부 유족들은 통제선 밖에서 추념식 모습을 지켜보는 모습이 연출됐다. 일부 유족들은 “대통령 당선자가 왔다고 오늘 제사의 제주인 유족들의 출입을 막으면 되느냐”고 분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강아무개(81)씨는 “대부분의 유족이 고령이어서 걷는 게 불편한데 이렇게 통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