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기 4·9통일평화재단 이사가 1일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다 과장입니다. 제 살기도 바빴는데요.”
박중기(88) 4·9통일평화재단 이사는 1975년 4월 9일 박정희 정권이 국가보안법을 뒤집어 씌어 ‘사법 살인’을 저지른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 희생자 유족을 언제부터 도왔냐는 질문에 “도운 게 별로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은 박 이사 팔순 기념 문집 <헌쇠 80년>(2013년)에 이렇게 썼다. ‘그(박 이사)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 인혁당 가족들 곁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돌본 사람은 없다. 그의 희생과 헌신은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는 (자립하려는 인혁당 피해자 가족 요청에) 보증을 섰다가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했다.’ 인혁당 사건 때 고문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별세한 류진곤 선생 아들 동민씨는 ‘박 선생님이 상처투성이가 된 우리 가족 앞에 나타나, 어느 날 나를 백화점으로 불러 외투를 사 입히고 대학에 합격한 겨울에는 입학금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고 박 이사를 떠올렸다. ‘인혁당 사형수’ 고 김용원 선생 아들 민환씨는 ‘고통스럽고 두려운 어린 시절의 기억에 박중기 선생이 느끼게 한 온기가 있어 따스함과 사랑이 공존했다’고 문집에 썼다.
2008년 재단 창립 이후 줄곧 중심에서 인혁당재건위 사건 희생자들의 정신 계승과 추모 활동을 펼쳐온 박 이사를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2004년부터 6년 동안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의장도 맡았다. 유신 시절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건인 인혁당 재건위 희생자들은 2007년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고 그 뒤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았다.
인터뷰는 박 이사 청력이 많이 손상돼 질문 음성을 활자로 바꿔주는 휴대폰 앱의 도움을 받았다. 그가 노년에 청력이 크게 떨어진 것도 인혁당 재건위 사건 때 당한 고문 후유증이란다. “야전용 전기발전기를 돌려 전기 고문을 하더군요. 노련한 고문 기술자들이 드르륵 발전기를 돌리면 몸에 불이 납니다. 조직을 있는 대로 다 불라고 했죠. 그때 고문으로 왼쪽 눈을 실명했어요. 입도 틀어지고 왼쪽 귀도 잘 안 들리게 되었죠.”
64년 1차 인혁당 사건 때 구속돼 1년 실형을 살았던 그는 10년 뒤 인혁당 재건위 사건 때는 두 달 반 극심한 고문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그가 당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데는 73년 이른바 서울대 유인물 사건으로 구속돼 옥에 6개월가량 갇혔던 게 컸단다. 옥에 있었던 확실한 알리바이 때문에 ‘간첩 조작’이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동료·선후배 8명을 잃은 75년 4월 9일 이후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박 이사는 특히 서울대 물리학과를 나와 경기여고 교사를 하다 사법 살인을 당한 고 김용원 선생에 대한 죄스러움이 컸단다. “용원이와 1년 반 자취 생활도 했어요. 고교 시절 늘 1등을 도맡아 한 용원이를 두고 이수병(인혁당 희생자)이 ‘용원이는 천재가 아니라 대재야’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서울대 유인물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간 제가 (조직 활동에서) 해야 할 자리에 용원이가 대신 들어갔어요. 제 대신 용원이가 죽었죠.”
석방 뒤에도 경찰의 근접 감시를 받던 그는 75년에 구멍가게를 열어 생계를 꾸리다 80년에 시작한 고물 장사가 자리를 잡으며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되었단다. 94년에는 고철 장사로 업종을 바꿔 3년 뒤 한보철강 부도 사태로 타격을 입을 때까지 운영했다. 고 이돈명 변호사가 박 이사의 호를 ‘헌쇠’로 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64년 1차·75년 2차 ‘간첩조작 사건’
고교 때 만든 동아리 ‘암장’ 7명 연루
“73년 옥살이 ‘알리바이’로 죽음 면해”
80년대 고물장사…희생자 유족 도와
2008년 재단 꾸리고 추모 사업 앞장
“민중세상·진짜 민주사회의 꿈 믿어”
“민주유공자법 제정해 명예 회복을”
일제 강점기인 1934년 경남 밀양에서 난 박 이사는 밀양중을 나와 부산으로 가 신문배달을 하며 경남공업고를 다녔다. 그는 고3이던 1954년에 한 학년 아래인 부산사범생 이수병과 부산고생 김금수(전 노사정 위원장)를 만나 사회과학 독서 동아리 암장을 만들었다. 이 동아리 구성원들은 이후 4·19와 박정희 정권 기간 한국사회 변혁운동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고교 졸업 뒤에도 암장 이름으로 부산에서 통일 강연회 등을 열었고 4·19가 난 1960년에는 암장의 조직적 결단으로 구성원 3명을 부산지역 진보 청년운동단체 민족민주청년동맹(민민청)에 파견 보내기도 했다. 이때 박 이사는 민민청 서울맹부 투쟁국장을 맡았고 이듬해 2월 결성된 통일운동연대체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 전국위 청년부장도 지냈다. 인혁당 1차와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은 암장 구성원이 7명이나 된다.
“김금수를 통해 이수병을 알게 되었죠. 셋이 판잣집 내 자취방에서 서너 달 동안 매주 한 차례씩 만나 독서 토론하고 6·25 이후 나라가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죠. 제 고향 집안 형이 저한테 준 애사기(중국인 마르크스주의자)의 <대중철학>이나 <세계사 교정> 같은 책도 읽었죠. 그러다 수병이가 뜻이 맞는 학생들을 더 가입시키면 어떻겠냐고 제안해 10여 명으로 늘었어요.”
독서토론 모임이 어떻게 사회변혁 운동으로 이어졌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구성원들이 토론만 한 게 아니라 실천을 병행하며 발전한 게 컸어요. 우정도 워낙 돈독했죠. 암장은 순수한 사람들이 모였어요. 응집력이 강해 빠져나오기가 힘들었어요. 특히 수병이가 사람 끄는 능력이 놀라웠죠. 토론을 해도 소견이 남달랐어요. 일을 그르치는 일도 없었죠. 암장 성원들은 고교 때 약속한 것을 정도 차가 있을지언정 그대로 지켰어요. 어긴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 외세를 배격한 평화 통일’. 그가 암장 친우들과 함께 꿈꿔온 세상이다. 그는 밀양중을 다닐 때도 학교 선배들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 반대 유인물을 붙이고 다녔단다. 이런 신념의 뿌리가 뭔지 궁금했다. “우리는 ‘왜정’ 때 크면서 일본 농장에서 사역도 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컸어요. 해방되고는 모두 우리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일본보다 더 악독한 친일파들이 나타나 나라가 옳게 가지 못 하게 하더군요. 이런 이야기를 집안이나 동네 어른들이나 학교 선생님들한테 많이 들었어요.” 그는 독립운동가 김원봉이 해방 후 처음으로 고향 밀양을 찾았을 때 환영 나갔던 기억도 들려줬다. “약산 김원봉이 당을 만들려고 경남 일대를 순회하고 고향을 방문했죠. 살얼음이 낄 무렵이었는데 밀양 들판 전체가 사람으로 가득 찼어요.”
그가 암장을 만들고 7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때 꿈꾼 세상과 지금 어느 정도 가까워졌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민족의 위기입니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도 심해지고 있어요. 보수가 일하는 사람 노동의 질에 따라 정해지는 게 아니라 권력이나 다른 작용으로 결정됩니다. 그 차이가 작을수록 진짜 민주주의에 가까워집니다. 나는 동학 때부터 꿈꿔온 민중 세상 그리고 진짜 민주 사회가 꼭 이뤄진다고 생각해요. 지도력 있는 대중 지도자가 나오면 촛불은 다시 일어날 겁니다.”
재단은 설립 이후 매년 4월 9일이면 하던 인혁당 희생자 합동추모행사를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된 재작년 이후 열지 못하고 있다. 올해도 인혁당 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과 대구 현대공원 묘역 등에서 가족 중심으로 따로 추모 행사를 하기로 했다. 박 이사는 9일 대구 추모 행사에 참가할 계획이다. 그는 “코로나 전에는 몸이 좋지 않은 유족들 집을 찾아 위로도 드렸는데 재작년부터는 그것도 쉽지 않다”며 “인혁당 희생자 고 우홍선 선생 부인 강순희씨가 몸이 불편해 거동이 힘들다고 하는데 찾아 뵙지도 못해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국회 앞에서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적어도 민주화 운동을 하다 사망하거나 장애를 갖게 된 분들은 민주 유공자 지정을 해 보훈처가 묘소 관리라도 하면 좋겠어요. 사회적 명예 회복이 필요해요. 현 정부에 기대를 했는데 우선 순위에서 밀려요.”
마지막으로 그가 천재적인 재간을 가졌다고 평가하는 이수병 등 인혁당 희생자 8명은 왜 죽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박정희가 정권 연장을 위해 이용했죠. 인혁당 사람들은 민족, 민주, 통일을 이야기했어요. 죽일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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