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인생 첫 기억은 아빠가 엄마 목에 흉기를 들이대면서 죽이겠다고 한 것이었어요.”
직장인 박아무개(26)씨는 본인을 ‘가정폭력의 생존자’라고 말한다. 어렸을 때부터 물리적·언어적 폭력이 끊이질 않았던 가정은 그에겐 편안한 안식처가 아닌 ‘공포의 공간’이었다. 꾹꾹 눌러온 감정이 어느날 폭발했다. 2020년 9월 그는 처음으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스트레스의 원인인 가정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했다. 그는 현재 원가정과 ‘단절’한 채 홀로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갑작스럽게 원가정과의 연을 끊고 홀로 살아가는 청년들이 있다. 2년 전 서울시 청년참여기구인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는 이러한 청년들을 ‘탈가정 청년’이라고 부르고 의제화에 나섰다. 가정폭력, 가정불화, 성폭력, 경제적 파산 등으로 인해 혈연으로 묶인 원가정과 주거·연락 등 관계를 단절한 이들이 탈가정 청년이라는 이름 아래로 묶였다. 당시 실태조사를 수행한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은 보고서에서 탈가정 청년을 연구한 배경으로 “각종 청년 지원 정책에서는 청년 뒤의 부모를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폭력이나 불화, 갈등 등의 이유로 탈가정한 청년이 취약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발견된다”며 “아직 정책 용어나 학술적 개념으로 체계화되어 있지 않은 탈가정 청년의 문제를 연구를 통해 환기하려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탈가정 청년들은 원가족과 정서적, 경제적 단절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독립’과 ‘탈가정’을 구분했다.
4일 <한겨레>는 탈가정 청년들의 삶을 살펴보기 위해 4명을 인터뷰했다. 이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탈가정은 생존”이라고 입을 모았지만 정상가족 중심의 사회에서 홀로 독립해 살아가는 게 녹록지 않다고 말했다.
“내가 ATM인가요?” “가정폭력 더는 견딜 수 없어”
지난 2019년 10월 탈가정한 이은(32·가명)씨는 부모로부터 경제적 착취를 당했다고 한다. 그는 “알바를 시작하게 된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30살 때까지 쭉 부모가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하고, 제 명의로 대출을 받는 등 10년 넘게 경제적 착취를 했다. 돈을 빌려주지 않으면 잠을 재우지 않고, 폭언하는 탓에 집에선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내가 에이티엠(ATM·현금인출기)인가란 생각도 들었다”며 “지금도 부모가 진 빚을 갚느라 7~8년째 신용불량자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아무개(22)씨는 끊이지 않는 가정폭력 때문에 아버지와 둘이 살던 집을 나와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 2010년 탈가정한 은설(30·가명)씨도 “2010년에 대학에 들어간 후로 청소년 인권운동을 시작했는데, 부모는 경제적 지원을 무기로 운동을 그만두라고 협박했다”며 “어릴 때부터 억압적인 가정환경에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성인’이 된 후에도 제 삶을 구속하려고 하는 데 반발감이 들어 집을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 2020년 서울시 청년청의 연구 용역을 받아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이 수행한 ‘청년정책 사각지대 발굴을 위한 ‘탈가정 청년’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탈가정은 ‘소수의 특별한 사례’만은 아니다. 보고서 연구진이 지난 2020년 12월 온라인설문조사업체 ‘서베이몽키’를 통해 만19~34살 성인 2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22.4%가 ‘탈가정 경험이 있다’고 답하고, 23.5%가 ‘탈가정 경험은 없지만, 시도하거나 희망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경제적 어려움에…대출에 매여 살거나 사기 당하거나
탈가정 뒤 이들을 괴롭히는 건 경제적 어려움이다. 학업과 취업 준비를 이어가면서 생활비 마련에 허덕였다. 대학생인 김씨는 “탈가정 직후인 2020학년도 1학기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휴학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학교를 휴학하고 일주일에 알바로 40시간을 보내고 있다. 원래는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다는 꿈을 가졌었는데, 지금은 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부터 든다”고 말했다. 박씨도 “탈가정 이후 진로 고민이나 취업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곧바로 입사 면접을 보러 다녀야 했다”고 했다.
불안정한 경제 상황은 이들을 대출과 사기의 굴레에 빠뜨린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핸드폰 소액결제를 계속하게 됐다는 은설씨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삶이 이어지다 보니 핸드폰 소액결제로 생활비를 보충했던 적이 있다. 탈가정한 주변 친구들을 보면 대부업체에서 고금리대출을 받아 그걸 갚기 위해 4년씩 투잡, 쓰리잡을 뛰는 경우도 봤다. 일자리 사기도 자주 당한다”고 말했다.
복지제도 등이 정상가족 중심으로 짜여 있다 보니 지원을 받기도 어렵다. 김씨는 “지난해 여름, 거주지 행정복지센터에 방문해 기초생활수급 신청이 가능한지 알아봤지만, 만 30살 미만은 단독으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말했다. 현재 국민기초생활수급제도는 부모와 주거를 달리하는 만 30살 미만의 미혼 청년은 원칙적으로 별도 수급을 받는 ‘보장 가구’로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중위소득 50% 이상을 버는 독립 가구일 경우, 미혼모·부나 중증장애인의 경우, 기타 가정폭력 등의 사유가 있는 경우는 원가정에 대한 고려 없이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할 수 있지만 가정폭력의 경우 입건 또는 접근금지명령 이력이 있어야 하는 등 그 기준이 까다롭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전세자금대출·국가장학금 등도 부모 소득 기준을 제출해야 하는데 탈가정 청년에겐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힘들어도…“나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삶”
그래도 이들은 탈가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박씨는 “탈가정 이후 불안하고, 외로운 날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탈가정한 첫날부터 수면제를 먹지 않아도 잠을 잘 자고, 우울증약도 이제 먹지 않는다. 이제야 살아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김씨는 “생활은 어려워졌지만, 내 정체성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삶이 된 것 같아 만족한다”고 말했다.
탈가정 청년들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청년들을 위한 긴급지원제도나 쉼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더불어 가족 구성권을 본인이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인정하는 사회적 인식과 정책이 확산해야 한다고 말한다. 박씨는 “무엇보다 탈가정 청년이 정책 대상으로 호명되는 것부터 시작해 긴급지원제도나 쉼터 등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은씨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만이 진짜 가족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병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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