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화가 자크-루이 다비드가 1787년 그린 유화 <소크라테스의 죽음>.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3월부터 방영한 <제이티비씨>(JTBC) 음악 예능프로그램 <뜨거운 씽어즈> 첫 방송은 본방을 지켜본 중견기업 P부장의 가슴을 몇 차례 먹먹하게 했다. 노련한 연기자들의 굴곡진 인생 이야기가 버무려진 감동적인 노래들이 이어져서였다. P부장은 재방송을 보고 관련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도 울컥했다. <천 개의 바람이 되어>를 부른 배우 김영옥이 나오는 대목에서 특히 그랬다.
“나의 사진(무덤) 앞에서 울지 마요/나는 그곳에 없어요/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나는 천 개의 바람/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김영옥이 내내 떨면서 불러 음정과 박자가 계속 흔들린 이 노래는 세월호 추모곡으로 자주 듣던 팝페라 가수 임형주의 빼어난 목소리나 솜씨와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노래의 진한 울림은 전혀 못 하지 않았다. 죽음을 자주 생각할 만한 나이의 진심이 담겨서일 것이다. 1937년생인 김영옥은 올해 88살인 P부장의 노모보다 세 살 적다.
“얼마 남지 않은 나의 미래를 상상하고 먼저 떠난 가족을 생각하며 노랫말을 곱씹었다”는 김영옥은 “슬픔을 자극하는 것 같지만 위로하는 음악”이라고 말했다. 죽은 뒤 사라지는 게 아니라 바람처럼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을 받고 좀 더 담담해진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
영혼의 자유로움을 꿈꾸며 기꺼이 죽음을 맞이한 대표적인 인물이 “너 자신을 알라”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테스 형)다. 기원전 399년 당시로는 상당히 고령인 70살의 소크라테스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던 사형을 선고받아 감옥에서 독약을 마시고 숨졌다. 소크라테스의 최후는 2400여년 전의 일이지만 비교적 상세하게 전해진다. 제자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론>에는 500명 배심원단의 유죄판결에 이어 사형선고를 받는 과정에서 펼친 그의 열변, <크리톤>에는 친구들의 강력한 탈옥 권유를 거부한 이유, <파이돈>에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던 그의 생각이 담겼다.
사형 집행 현장에 있었던 제자 파이돈의 목격담을 기록한 세 번째 책에서 소크라테스는 특유의 대화법으로 죽음이 다가올 때 “두려워하고 분노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설파했다. 욕망·두려움·어리석음으로 가득한 육신은 진리 추구의 장애물이므로 몸에서 영혼이 해방되는 죽음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철학자)이 오래전부터 바라던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런 주장의 바탕에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영혼불멸론이 깔려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물론 수학 공식으로 잘 알려진 피타고라스도 ‘인간의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관점을 가졌다. 독배를 들기 직전 친구·제자와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다양한 비유를 들며 ‘사람이 죽을 때 영혼도 파괴되고 해체된다’는 아테네인의 통념을 반박했다. 그가 죽음을 맞는 순간은 행복해 보였으며, 두려움이 없고 고상한 모습이었다고 파이돈은 전했다.
영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 대다수는 죽은 이의 넋을 기리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 종교인들은 교회나 사찰을 다니고 헌금을 하며 죽은 뒤 자신의 영혼이 천국(천상)에서 안식을 누리기를 기원한다. 하지만 영혼이 육체를 떠나 독립적으로, 사후 소멸하는 육체와 분리돼 존속하는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과학이 발달하고 지식이 풍부해진 오늘날도 사람의 영혼에 대해 딱히 더 많이 안다고 할 수 없다.
사실 세상은 우리가 모르는 것 투성이다. 물질의 기본단위인 원자 내부 입자들의 상대적 거리는 은하들 사이만큼 멀다는데 그런 미시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되는가. 상상도 가지 않는 138억년 전 대폭발(빅뱅)로 형성됐다는 우주는 도대체 어디까지 팽창하는가. 돌연변이 바이러스 하나에 세계가 비틀거리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몸속 세포·미생물·신경다발의 움직임을 통제는커녕 파악조차 제대로 못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관찰할 수 있는 것들도 이럴진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와 영혼을 안다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경제적 선택
명확하지 않을 때는 자신에게 유리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소크라테스나 김영옥처럼. 나이 들수록 육신은 밉게 보이고 여기저기 하나둘씩 기능부전에 빠진다. 불에 타거나 땅에 묻혀 썩어 없어질 육신에서 풀려난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는 것은 물질적으로 윤택하지 않은 사람들이 외치는 정신 승리가 아니다. 매우 지혜롭고 경제적인 사고방식이다. 온젠가 찾아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고 남은 삶에 충실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경제학은 투입 대비 산출의 최대화를 추구하는 학문이다. 되도록 들이는 비용과 에너지를 줄이고 효용가치를 늘리는 것이 경제적이다. 인생의 효용은 국내총생산(GDP)처럼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물질·서비스에 국한되지 않는다. 최고의 효용은 행복 또는 충만감이다. 죽을 때까지 돈을 꼭 쥐고 있어야 한다고 흔히 말하지만, 돈이나 물질과 행복의 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멀어진다.
머지않아 자유로워질 영혼을 살찌우는 것이 행복감을 늘리는 동시에 노후 불안을 줄이는 지름길이다. 투입 대비 산출 측면에서 훨씬 효과적인 선택이다. 거기에는 큰돈이 들지 않는다. 가까운 공공도서관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독서, 이곳저곳 잘 가꾸어진 길에서의 산책, 가까운 이와의 웃음 섞인 대화 정도면 충분하다. 수십억원대 아파트를 깔고 살거나 값비싼 한우 투플러스를 먹지 못해도 된다. 물질적 욕망의 크기가 줄어드는 만큼 영혼은 살찐다.
자유인의 삶을 그린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로 널리 알려진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생전에 써둔 묘비명은 이렇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P부장은 몇 자 손질한 문구를 되새기며 자유로운 영혼을 꿈꾼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두려울 것도 없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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