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헌 변호사가 2018년 5월15일 저녁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한겨레> 창간 30돌 기념식에서 한겨레신문 창간위원장으로서 축사를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88살을 일기로 20일 별세한 한승헌 변호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인권변호사로 57년간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헌신해왔다. 한국 역사상 최악의 사법살인 사건으로 꼽히는 인혁당 사건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건까지, 고인은 수십 년 동안 굵직한 시국사건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리며 인권변호 역사를 써왔다. 정작 그는 여러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인권변호사라는 말은 사라져야 한다”고 했다. 변호사라면 마땅히 인권을 수호해야 하므로, 인권변호사라는 호칭은 불필요하다는 얘기였다.
한 변호사는 1934년 전북 진안군에서 태어났다. 고인의 말에 따르면 ‘첩첩산중’이라고 할 만큼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 마을이었는데, 한학을 배워 이웃 주민들의 제사 축문 등을 대필해주곤 했던 아버지 덕에 일찍이 한문과 서예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중·고등학생 때 신문 배달, 잡지 판매, 프린트용 글씨를 쓰는 필경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학업을 마쳤고, 1953년 전북대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고인이 처음부터 법조인을 꿈꿨던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 학적부에 ‘언론인’을 기재하고 신문기자가 되길 희망한 적도 있었다. 대학 시절엔 학보 ‘전북대학교보’ 창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뒤 ‘관보 종사자’ 노릇을 하는 언론 풍토를 보며 언론인이 되길 포기했다. 대신 “고등고시에 붙으면 취직 걱정은 면할 수 있다”는 말에 고시공부에 뛰어들었다. 23살이던 1957년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면서 법조계에 입문했다.
1954년 3월 전북대 정치학과 시절의 한 변호사. <한겨레> 자료사진
검사로 입직한 고인은 1960년부터 5년간 통영지청, 법무부 검찰국, 서울지검 등을 거쳤다. “성격상 사람의 죄책을 추궁하는 것보다는 억울한 사람을 옹호하는 변호활동이 적성에 맞을 것으로 생각돼” 1965년 검사 옷을 벗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는 공직에서 벗어난 그해를 ‘유난히 격동이 심한 한 해’로 회고했다. 굴욕적인 한일 기본조약, 베트남 파병 등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정부 투쟁이 잇따르고 있었고, 문인들의 반정부 시국선언이 발표되던 시절이었다.
한 변호사를 본격적인 시국사건 변론에 뛰어들게 한 남정현 작가의 소설 <분지> 필화 사건도 이때 터져 나왔다. 남 작가가 이 소설로 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아 재판에 넘겨진 사건이다. <분지>는 한국이 광복 후에도 미국 등 외세에 예속돼 있다는 시각을 풍자적으로 쓴 작품이다. 소설이 발표된 뒤 북한 조선노동당 기관지가 이 소설을 실었고, 남 작가는 그해 5월 소설의 용공성을 주장하는 중앙정보부에 체포된다. ‘북괴의 대남전략에 편승해 반정부 선동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해 7월 구속된 남 작가에 대해 검찰은 “남한의 현실을 왜곡 허위선전하며 빈민 대중에게 계급 및 반정부의식을 조장했다”며 그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다른 문인으로부터 ‘변호를 맡아줬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은 한 변호사는 “터무니없는 용공 혐의에 짓눌린 작가의 수난을 외면할 수 없다”며 변호를 맡았다. 그의 첫 시국사건 변호였다.
<분지>의 작가 남정현이 1967년 5월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 사건은 검찰이 자수 간첩을 증인으로 내세우고, 변호인 쪽에선 이어령(2022년 작고) 문학평론가 등을 증인으로 신청해 무죄를 주장하며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1967년 6월 1심 재판부는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고, 이 판결은 최종 확정됐다. 문학작품에 대해 처음으로 용공성을 문제 삼은 ‘문학작품 용공탄압 1호’ 사건이었다. 이를 두고 한 변호사는 자신이 걸어온 삶을 연재한 <한겨레> ‘길을 찾아서’(2009년 1월20일치)에서 “동인문학상까지 받은 유망한 작가 한 사람은 전과자가 되었고, 이 나라의 문학과 창작의 자유는 반공법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되었다”라고 썼다.
군검찰 구형대로 선고하던 긴조 시대…“정찰제 판결” 어록 남겨
이 사건을 계기로 시국사건 변호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한 변호사는 동백림 사건(1967), 통일혁명당 사건(1968), 김지하 <오적> 필화사건(1970), 울릉도 간첩단 사건(1974),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1980) 등 엄혹한 시절 주요 시국사건의 변호인으로 참여했다. 수많은 사건 가운데 그가 잊을 수 없다고 꼽은 사건은 민청학련 사건(1974)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1974)이다.
1974년 5월 대통령 긴급조치 사건의 항소심을 맡은 비상고등군법회의 법정의 내부 전경. <한겨레> 자료사진
유신정권은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이 거세지자 1974년 4월 긴급조치 4호를 제정하고 본격적인 탄압에 나섰다.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과 관련한 단체를 조직하거나, 이들 단체에 가입 또는 구성원에게 편의를 제공하면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중정은 긴급조치 4호 위반과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내란선동 등의 죄목으로 청년들을 연행해갔다. 이에 고인과 함께 1세대 인권변호사로 분류되는 홍성우(2022년 작고)·황인철(1993년 작고)·강신옥(2021년 작고)·조준희(2015년 작고) 변호사 등이 이 사건 변호를 맡았다. 재판부가 당당히 의견을 밝히는 피고인들을 법정 밖으로 내쫓은 뒤 변론을 하라고 하자, 한승헌 변호사는 “본 변호인은 빈 의자를 변호하러 온 것이 아니라, 방금 퇴정 당한 청년 학생들을 변호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와 있다”고 재판부에 맞서기도 했다.
한 변호사가 대리했던 청년 여정남(당시 31)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법살인을 당한 일 또한 고인은 평생 기억에서 지우지 못했다. 민청학련 배후에 인혁당 재건위가 있다고 주장하며 대구·경북지역 혁신계 인사 탄압에 나선 유신정권 아래에서 법원은 여정남 등 8명에게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1974년 6월 1심을 시작으로 대법원 확정까지 걸린 시간은 단 10개월이었다. 1심부터 3심까지 일관되게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 8명에 대한 형 집행은 1975년 4월8일 대법원 판결 뒤 불과 18시간 만에 이뤄졌다. 한 변호사는 당시 이 사건의 혐의는 “조작투성이”였고, 피고인 진술이 법정에서 제지되거나 피고인 쪽 증인신청은 무조건 기각되는 등 사실상 판결은 정해져 있었다고 회고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사형수 8명은 2007년 1월23일 재심에서 전원 무죄를 선고받았다. 고인은 긴급조치 위반 사건에서 군 검찰이 구형하면 군법회의가 그대로 선고하는 촌극을 두고 “대한민국의 정찰제는 백화점 아닌 군법회의에서 먼저 확립되었다”며 ‘정찰제 판결’이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1975년 5월 잡지에 기고한 글 ‘어떤 조사’를 빌미로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한승헌 변호사. <한겨레> 자료사진
민주화운동가를 대변하며 시대와 맞섰던 고인은 그 자신이 피고인이 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1972년 사형 당한 김규남 민주공화당 의원을 애도하는 글 ‘어떤 조사’를 그해 한 잡지에 기고한 게 빌미가 돼 1975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것이다. 전례 없는 ‘변호사 필화 사건’에 대한변호사협회·한국문인협회·한국기자협회 등과 일본 각계 인사 400여명이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냈고, 변호사 129명이 나서서 그의 변호를 맡았다. 1976년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판결이 확정되면서 9개월 넘는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났지만, 이 사건으로 그는 8년여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가 1983년에서야 복권됐다. 여러 고난 속에서도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던 한 변호사는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도 연루돼 계엄법 위반 혐의로 또다시 구속됐지만, 이 사건도 23년 만인 2003년 재심에서 전원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한겨레> 창간위원장 맡아 언론자유 힘써…‘유머의 만인화’ 추구하기도
권위주의 정권 시절 해직기자들에 대한 법률자문을 해주며 언론인들과도 가깝게 지낸 한 변호사는 국민의 뜻을 대변할 신문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1988년 5월15일 해직기자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국민주신문 <한겨레> 창간위원장을 맡았다. 창간 이듬해인 1989년 7월 리영희 <한겨레> 논설고문이 방북취재를 기획했다 탈출예비음모죄로 구속되자, 한 변호사 등이 변호인단을 꾸리고 항의광고를 내는 등 언론자유를 위해 힘썼다. 1988년 5월28일에는 시국사건 변호사들이 모인 정법회(정의실천법조인회)를 모태로 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발족에도 참여했다.
1989년 5월15일 <한겨레> 창간 1주년 기념식에서 창간위원장을 맡은 한승헌 변호사(오른쪽)가 축사를 하고 있다. 왼쪽은 <한겨레> 송건호 초대 대표이사. <한겨레>자료사진
한 변호사는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지고 국민의정부가 들어서자 감사원장(1998∼99)을 맡았다. 참여정부 시절엔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2005)을 역임하며 사법제도 개혁에 앞장섰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에는 민주화운동과 사법개혁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변호사이면서 문인이었던 고인은 1961년 첫 시집 <인간귀향>을 비롯해 세 권의 시집을 냈고, 변호사로서의 활동을 기록하는 등 활발한 저술활동 통해 일평생 40권의 책을 발간했다. 2019년에도 민주화 운동가들과의 추억을 회고한 에세이집 <그분을 생각한다>를 냈다. 유머가 삶에 스며드는 ‘유머의 만인화’를 꿈꾸며 평소 농담을 즐겼던 고인은 <산민객담> 등 잡지에 연재한 유머 칼럼을 묶어 세 권의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가난·전쟁·고학·반독재·감옥’으로 이어진 일평생 동안 “웃을 만한 일이 별로 없는 환경에서 살아왔다”고 삶을 돌아보면서도 “유머는 정서 고갈과 일상의 삭막함을 치유하고 삶의 평화와 품격을 담보한다”는 생각으로 웃음을 잃지 않는 삶을 추구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중앙홀에서 열린 사법부 70주년 기념식에서 한승헌 변호사(맨 오른쪽)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인권변호에 앞장섰던 1세대 인권변호사로 분류되지만, 그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선두의 사람, 즉 앞장서서 일을 꾸미고 이끄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그 대열의 어중간한 자리에서나마 결코 이탈은 하지 않고 꾸준히 따라다닌 사람이었다.”
고인의 빈소는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 차려졌다. 발인은 25일이다.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영면에 든다.
신민정 기자
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