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사들이 설계보상비를 받기 위해 지하철 연장 공사 등 사업 입찰에 ‘들러리’로 참여해 공기업에 손해를 끼쳤다면, 공기업도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낼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원심은 입찰 주체가 ‘국가’이므로, 공기업은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없다고 봤는데 이를 뒤집은 것이다.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부산교통공사가 대우건설 등을 상대로 낸 설계보상비 반환 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승소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9일 밝혔다.
부산교통공사는 조달청에 ‘부산지하철 1호선 연장 공사’ 사업을 요청했고, 조달청은 2008년 12월 입찰을 공고했다. 공고에는 ‘낙찰자로 결정되지 않으면 설계비를 일부 보상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대우건설, 한창건업, 금호산업, 용호건설, 혜도종합토건, 에스케이(SK)건설, 삼미건설 등 7개 회사는 현대건설, 한진중공업, 코오롱글로벌과 담합해 이들 세 회사가 낙찰자로 결정되도록 계약을 맺고, 나머지 업체는 형식적인 ‘들러리’로만 참가하기로 했다.
이후 현대건설 등 세 곳이 사업자로 낙찰됐고, 탈락된 7개 회사 가운데 대우건설과 금호산업, 에스케이건설은 부산교통공사로부터 설계보상비 4억7천만원∼5억5천만원을 받았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14년 4월 이 같은 담합 행위를 지적하며 현대건설 등에 과징금을 부과했다. 부산교통공사는 탈락한 7개 기업을 상대로 “설계보상비를 돌려달라”며 소송을 냈다.
대법원은 설계보상비를 지급해 피해를 입은 부산교통공사가 건설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부산교통공사은 공사계약 당사자는 아니지만, 수익자로서 조달청과는 독립된 지위에서 설계보상비를 지급했다. 부산교통공사에 손해가 발생했다면 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며 “피고들은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원고에게 설계보상비 상당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앞서 1심은 부산교통공사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대우건설 등 7개 기업에 모두 15억4천만원 가량을 부산교통공사에 지급하라고 판단했다. 1심은 “공정거래법에 위반되는 공동행위에 의한 고의가 인정돼 민법상 불법행위에 해당한다. 7개 건설사들은 공동해 손해배상책임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2심 부산교통공사가 설계보상비 반환 소송을 청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2심은 “입찰 주체는 조달청이 소속된 대한민국이다. 입찰 공고를 한 것도 부산교통공사가 아닌 조달청”이라며 “건설사들의 공동행위로 설계보상비 손해가 발생했어도, 입찰을 실시한 대한민국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부산교통공사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전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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