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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팀장님” 대신 “혜진”으로 불러줘…‘예의 갖춘 반말’의 실험

등록 2022-05-10 06:59수정 2022-05-10 11:53

문학잡지 <릿터> 민음사 편집부 문학2팀
지난해 11월부터 ‘이름+반말’ 쓰는 평어 실험 중
지난 4일 서울 강남구의 출판사 민음사에서 편집부 문학2팀이 회의를 하고 있다. 서혜미 기자
지난 4일 서울 강남구의 출판사 민음사에서 편집부 문학2팀이 회의를 하고 있다. 서혜미 기자

“오늘은 발상을 모으는 단계니까 이전에 나왔던 아이템들을 얘기해보자.” “그때 혜진이 말했던 게 뭐였지?”

지난 4일 서울 강남구 민음사 건물 5층의 한 회의실, 박혜진(36) 팀장의 말에 대리급 편집자 정기현(30)씨가 되물었다. 이날 민음사 편집부 문학2팀 구성원 4명은 격월간 문학잡지 <릿터>의 커버스토리 소재로 무엇을 다룰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회의 참가자는 팀장(부장)과 팀원(대리·사원), 그러나 이곳에선 여느 회사에서 쉽게 들려오는 “팀장님”, “ㅇㅇ씨” 같은 호칭이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았다. 입사 4년차인 사원 김세영(27)씨는 박혜진 팀장(입사 12년차)의 말에 “응”이라고 맞장구를 치거나 “그럼 혜진이 하자”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들은 지난해 11월부터 ‘격식을 갖춘 반말’인 평어를 회사에서 쓰고 있다. 평어라는 개념을 알게 된 정기현씨가 이를 잡지의 커버스토리로 다루자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시작됐다. 팀장인 박혜진씨는 문학2팀 구성원 5명이 3개월 동안 직접 써보고 잡지에 수기를 싣자고 제안했다. 평어는 반말과 비슷하지만, 상대의 이름을 부를 때 “혜진아”, “기현아” 대신 “혜진”, “기현” 등 이름만 부른다는 차이가 있다. 이름만큼은 반말 호칭으로 부르지 않는 것이다.

평어는 보통의 일터나 조직에선 생소한 개념으로 일부 일터에서 ‘실험 중’ 이다. 평어는 디자인 대안 교육 커뮤니티인 ‘디자인학교’라는 곳에서 고안했다. 최봉영 전 한국항공대 교수(한국학)는 한국어 특유의 존댓말과 반말이 한국인을 “차별과 억압이 중심을 이루는 유사신분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만든다고 주장해왔는데, 디자인학교 구성원들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서로를 동등하게 대하는 평어를 쓰고 있다고 한다.

평어 사용 후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의사소통이 더 간결해졌다는 것이다. 정기현씨는 “메일함을 열어보면 이전엔 불필요하게 예의를 차린 말이 굉장히 많았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예컨대 메일에 흔히 쓰는 “안녕하세요,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ㅇㅇ드림”라는 문장은 “안녕, 확인 부탁해. 고마워”로 훨씬 글자 수가 줄었다. 또 박혜진 팀장은 “평어는 언어의 높이를 없애는 것”이라며 “잡지를 만들려면 계속해서 팀원들과 의견을 나눠야 한다. 그 과정에서 허들이 없어지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직적 위계에 따라 일하는 회사에서 평어를 쓰는 건 쉽지만은 않다. 지난해 3월 민음사에 입사한 김지현(35)씨는 “한 2주 동안은 ‘어떻게 하면 말을 안 할 수 있지?’ 이 고민을 했다”고 했다. 가장 어려웠던 건 “죄송합니다, 팀장님” 대신 “미안해, 혜진”이라는 말을 해야 할 때였다. 결국 평어를 사용한 지 한달 반이 지났을 무렵, 문학2팀은 디자인학교에서 평어를 쓰는 철학자 이성민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씨와 문학2팀은 워크숍을 열고 조를 나눈 뒤, 평어를 사용하기 난감한 상황에 모범 답안을 만들어 연습했다.

이들은 평어를 주제로 다룬 <릿터> 34호가 출간된 지난 2월 이후에도 계속해서 회사에서 평어를 쓰고 있다. 최근 민음사는 독서 커뮤니티인 ‘민음북클럽’ 가입자에게도 평어를 사용한 안내서를 보내기도 했다. 회사에서 평어를 사용한 지 7개월째, 박혜진 팀장은 “팀원들이 ‘혜진’이라고 제 이름을 불러줄 때 느끼는 해방감이 있다”고 말했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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