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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쓰레기통 감방 치웠더니 “옮겨라”…내 마음 한자락 탐욕을 느끼다

등록 2022-07-18 10:00수정 2022-07-18 10:22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42) 감옥의 영성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26개월 옥중생활
변으로 꽉찬 감옥 화장실 치웠더니 “옮겨라”
잠깐 머문 방에서 소유욕 느낀 자신 돌아봐
감옥의 영성
감옥의 영성

“요셉의 주인은 그를 잡아 감옥에 쳐넣었다. 그곳은 임금의 죄수들이 갇혀 있는 곳이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감옥에 살게 되었다.”(창세기 40, 20-21)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기 1, 21)

요셉이란 이름은 의인을 뜻합니다. 성조(聖祖)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지만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으로 왕의 특사를 통해 극적으로 풀려납니다. 그 후 이국땅 이집트의 총리가 되고 친족과 일행을 구했다는 것이 창세기의 증언입니다. 이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고진감래의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영적으로 좀 더 성숙하게 됩니다. 욥기는 바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공수래공수거의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사건들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고통 그리고 부활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종합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입니다. 이 원리를 우리는 영성(靈性)이라고 합니다. 영(靈)과 성(性)의 합성어인 영성은 ‘영에도 성품(性品)이 있으니 품위 있게 살아야 한다’라는 교훈입니다.

이제까지 영성은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진전하고 종교의 구원관이 넓어지고 보편화되면서, 영성도 세상과 역사 속에서 그리고 일상의 삶 가운데에서 태동하고 성장하는 그 자체라고 해석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과 역사 현실에 기초한 창조적 영성, 연민과 자비, 일치와 연대, 공존과 공생, 공감의 영성입니다.

영성(Spirituality)의 라틴어 어원은 영(spirit)과 질(quality)의 합성어입니다. 영어 단어 말미에 quality의 약어인 –ity를 붙이면 영성(spirituality), 인간성(humanity), 육체성(coporality), 동물성(animality), 평등성(equality), 남성성(masculinity), 여성성(femininity), 보편성(universality) 등의 합성어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 동양어권에서는 ‘Spirituality’를 ‘영성’으로 번역했습니다. 질(質)을 성(性)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동양어권에서 성(性)은 사물의 본질, 우주 만물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마땅히 그러해야 하며 그리로 회귀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니 비슷한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영성이란 하느님 앞에 벌거벗은 몸으로 서 있는 자세입니다. 공수래공수거가 바로 그 선언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죽음 이후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바로 벌거벗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 벌거벗고 서 있자니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부끄러운 인간은 하느님 앞에 부복하여 전전긍긍하며 하느님께 용서를 빌고 자비를 청하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정화와 단련의 첫 과정입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빼앗기는 과정에서 배우는 가난과 비움

가톨릭에서는 이를 연옥(煉獄)이라 번역했는데 정화소라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시편 130, 3)라는 시편 작가의 고백도 바로 정화 과정을 말합니다.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이 영성의 첫걸음입니다. 인간의 모든 수치와 고통, 아픔에는 나름대로 정화적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죽음이 그 정화소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감옥은 바로 죽음의 문턱입니다. 제가 감옥의 삶을 ‘감옥의 영성’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감옥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 우선 벌거벗고 신체검사를 합니다. 온몸을 확인하고 몸의 특징과 표시, 상처 등 모든 것을 신분장에 자세히 기록합니다. 벌거벗은 몸은 바로 죽음의 간접 체험입니다. 입고 있던 모든 것을 벗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합니다. 목욕탕에서 자유의지로 벗는 것과 감옥에서 강제로 벗김을 당하는 것은 크게 다릅니다. 남성의 경우, 군에 입대했을 때 이러한 경험을 합니다. 다만 그때에는 죄인이 아닌 공인의 신분이고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과 함께이니 수치심은 없습니다. 하지만 감옥에서 당하는 벗김은 그 자체가 형언할 수 없는 수모이고 일종의 고문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이 바로 정화의 과정입니다. 벌거벗어야 비로소 자신의 온몸을 확인하고 비로소 제대로 씻을 수 있습니다. 죄수복으로 갈아입은 후에는 수번을 받습니다. 국가보안법 해당자는 빨간표, 긴급조치 해당자는 노란표 등을 가슴에 부착합니다. 당시 감옥에서 거치는 필수 과정이었습니다.

벌거벗긴 자의 자유, 감옥에 갇힌 자의 자유, 그것이 바로 빼앗김의 과정을 통한 가난과 비움, 낮춤과 하강(下降)의 영성입니다. 러시아의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이를 증언했습니다. 그는 스탈린 치하의 수용소에서 보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몇 편의 소설을 썼습니다. 그중 하나가 단테의 지옥에서 제목을 따온 ‘제 1원’(In The First Circle)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 글렙 네르진은 수학 교수인데 자가 검열을 하면서 조심 조심 강의를 했지만, 결국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들을 다 빼앗겼다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자유로움과 해방을 체험합니다. 이제 다 빼앗기고 이 몸 하나만 남았는데 이 몸을 바칠 각오를 하니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숨을 건 결단의 자유, 그게 바로 비움의 영성, 순교의 영성, 초월의 영성 그리고 감옥의 영성입니다. 그는 마침내 자유를 찾고 감옥이 제일 거룩한 곳임을 체험합니다. 저는 감옥에서 이 소설을 읽으며 크게 공감하고 깊이 감동하였습니다.

요한, 베드로, 바오로도 갇혔던 감옥

제가 감옥을 처음 체험한 것은 군대에서입니다. 1962년 대학교에서 철학 과정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는데 공교롭게도 제가 근무한 곳이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였습니다. 그곳에서 난생처음 사회의 모순과 어둠을 체험했습니다. 그 후, 사제의 길에서 저는 의로운 청년 학생들 그리고 고통받는 형제자매들과 손을 잡은 결과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긴급조치를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진짜 감옥, 서대문 형무소에 갇힌 것입니다. 그곳은 육군교도소와는 전혀 다른 살벌한 곳이었습니다.

저는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천정에 성에가 잔뜩 끼고 마룻바닥은 늘 눅눅한 서대문 형무소의 겨울은 특히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2천 년 전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란 믿음과 기도로 모든 고통을 의지로 극복했습니다. 게다가 서대문 형무소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항일 투사들이 고난받으신 현장이라 그분들을 마음에 모시고 영적 일치를 확신하며 굳은 다짐을 했습니다. 순국선열과 순교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어서 더 힘이 났습니다.

저는 신학교의 생활과 비슷하게 시간표를 정해 생활했습니다. 하루를 기도, 묵상, 요가, 독서 등으로 시간을 배분했습니다. ‘백수가 더 바쁘다’라는 우스갯소리처럼 감옥에서도 나름 바쁜 나날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묵상 중에 ‘감옥의 영성’이란 글귀가 떠올랐습니다.

인간을 정화하고 초심을 회복하기에 감옥만큼 훌륭한 장소는 없습니다. 감옥은 십자가상 예수님과 순교자들을 새롭게 만나는 생생한 고난의 현장입니다. 제게는 신학교가 제1의 수련 과정이었다면 감옥은 제2의 수련 과정이었습니다. 제가 감옥을 정화의 수련소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솔제니친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모든 것을 다 빼앗겼을 때 오히려 정화되고 지극한 순수에 닿는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감옥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니 그 체험이 새로웠습니다. 특히 감옥이란 두 글자가 아주 크게 제 눈에 그리고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눈을 감고 한참 동안 깊이 묵상했습니다. 성조 요셉의 감옥, 숱한 예언자들이 거쳐 가셨던 곳, 세례자 요한, 베드로, 바오로, 요한, 실라 등 수많은 사도가 갇혔던 감옥…. 밖에서는 그저 스쳐 지나갔던 성경의 감옥 이야기를 감옥 안에서 읽고 있자니, 쇠뭉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고 바로 이곳이 신앙의 정련소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갇힌 사람, 빼앗김, 노예’ 등의 단어가 살아 있는 구체적 현실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피정기도와 고행 등 모든 희생과 선행이 바로 감옥의 영성과 연결되었습니다. 저는 감옥 속에서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새삼 다시 깨달았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세상 어디에나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따라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우리는 정화되며 끝내는 완덕의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서대문 구치소에서 13개월, 광주교도소에서 3주, 공주교도소에서 9개월 등 총 1년10개월을 살았고, 두 번째는 영등포 교도소에서 꼭 100일간 수형 생활을 했습니다. 감옥은 힘든 곳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아 발견의 수련소, 하느님과 역사 앞에 진심으로 죄인임을 고백하며 전적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골고타 언덕 십자가 제사의 재현이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에 끌려간 첫날 밤, 수감 절차를 마치고 새벽 3시경 3사상 어느 방에 갇혔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며칠간 밤새 시달렸던 터라 정신없이 쓰러져 잤습니다. 두서너 시간 지나 기상 시간이 되었습니다. 깨어나 방을 둘러보니 완전히 쓰레기통이었습니다. 화장실 문 비닐은 다 찢겨 있었고 변기통에는 변이 꽉 차 있었습니다. ‘이게 진짜 감옥이구나!’ 싶었습니다.

‘하느님, 도와주십시오! 모든 고난을 이겨내게 해주십시오!’라며 끝없이 화살기도를 바치던 순간, 문이 열리더니 교도관이 물 한 통을 넣어주었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이 살 방이니 깨끗이 청소하시오!”라는 퉁명스러운 말과 함께. 저는 그 물로 바닥을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교도관에게 물을 더 달라고 청해, 그 추운 3월에 땀을 뻘뻘 흘리며 청소를 했습니다. 또 막대기를 얻어 화장실에 쌓인 변까지 깨끗하게 치웠습니다.

온세상 모든 곳이 ‘성소’

그리고 눈을 감고 ‘하느님, 참 힘듭니다. 신학교에 입학했던 첫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며 이 기간을 잘 이겨내겠습니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교도관이 덜그럭 문을 따더니 “이리 나오시오! 방을 옮겨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방을 옮긴다고요?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교도관이 “어서 나와요! 감옥에 자기 방이 어디 있어요?”라고 말해 할 수 없이 끌려나갔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두어 시간 동안 청소했던 수고가 너무 허탈했습니다.

그런데 새로 옮겨 간 곳은 재소자들이 사용하던 방으로 마루도 반짝반짝 빛나는 그야말로 새집 같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두어 시간 청소했다고 감옥에서 방을 안 빼앗기려는 이 마음이 바로 탐욕에 기초한 소유욕임을 깨달으며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다 빼앗긴 감옥에서도 뭔가 움켜쥐려는 탐욕이 살아 있으니 이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봅니다. 그러니 매 순간 극기와 내적인 영적 투쟁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귀중한 교훈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저는 이 체험을 교우들과 나누며 절제와 극기를 다짐했습니다.

사제로 살다 보니 저에게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데, 제 감옥 체험이 결정적으로 도움과 길잡이가 됩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조금 사치스럽거나 인위적인 고통을 호소한다 싶으면 이분들에게는 충격 요법을 씁니다. “당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봤어요? 매 맞거나 고문당해 봤어요? 굶주려 봤어요?”라고 강하게 묻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다고 생각하며 모든 고통을 이겨내자고 호소합니다.

몸은 갇혀 있지만 가장 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이 감옥이란 역설은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줍니다. 사실 저는 감옥에서 영적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성경 묵상과 함께 신학교에서 배운 이론 신학 전체를 실천적 관점에서 종합할 수 있었습니다. 성소(聖所)는 웅장하고 멋진 교회와 성당 건물만은 아닙니다. 허울과 가식을 벗고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을 마음에 모실 수 있는 곳, 온 세상 모든 곳이 바로 성소입니다. 기도와 전례 그리고 사회적 투신과 영성의 근원은 십자가 예수님의 사형 터, 곧 골고타 언덕입니다. 그 사형 터를 장엄하게 재현하는 곳이 바로 감옥입니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으로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에 저희는 주님이신 예수님을 흠숭하며 경배합니다. 십자가 아래 계셨던 성모님과 경건한 여인들도 기억하며 칭송합니다. 모든 천사와 성인 성녀, 예언자들과 순교자들 그리고 의인들을 부르며 노래합니다. 인생의 과정에서 만났던 사랑하는 모든 이들, 스승, 사제, 수도자, 형제자매, 은인 교우들과 동료들을 기억합니다. 무엇보다도 고난의 역사 현장에서 만났던 형제자매들과 동지들,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보안사 등 조사실에서 모욕을 당한 모든 이들을 기억합니다. 순국선열들, 민주주의와 인권 민족의 일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한 이들 그리고 소시민 형제자매들,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절감하며 옥고를 치른 모든 형제자매도 기억하며 만민을 위한 보편 지향 기도를 올립니다.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특히 지금도 감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이들과 그들의 부모, 형제자매, 친척, 은인 가족들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형제자매에게 베푼 사랑이 바로 주님께 베푼 사랑임을 확신하며 실천을 다짐하고 바치는 저희의 기도를 들어 허락하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며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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