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의 정당한 임금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촉구하는 미사’에 참석한 활동가들과 수녀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혜윤 기자
[편집국에서] 이세영 | 전국부장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유최안이 1㎥ 쇠우리에 제 몸뚱일 가두며 철창 밖에 적어 붙인 구호는 비장하고 서늘하다. 유최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끌려나가지 않을 공간이 필요해 만든 게 이 감옥”이라고 <시사인>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대로는 살 수 없어’ 옮겨간 공간이 도무지 그대로는 살 수 없어 보이는 한여름의 0.3평 철창이라니.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매한가지임을, 철창 밖 삶이 철창 안 삶과 다를 바 없음을 유최안은 온몸으로 증언하려 했던 것이라고 감히 나는 짐작해본다.
그의 철창 밖 삶이 어떠했는지는 소상히 알지 못한다. 다만 유최안이 속한 하청노조지회가 파업을 시작하며 내건 요구 두 가지를 보면 그들이 처했던 상황이 어렵잖게 그려진다. 그들 요구는 지난 5년간 삭감된 임금의 원상회복(30% 인상)과 단체협약 체결이다. 올랐어도 부족할 임금이 5년 새 3분의 1 가까이 깎여나가고,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노조의 목소리에 회사는 완강하게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는 얘기다. 조선업계의 고질인 다단계 하청 구조 속에서 20~30년 경력의 숙련노동자도 한달 200만원 안팎의 저임금을 감내해왔다는 지역언론 보도도 눈에 띈다.
우려스러운 건 유최안과 하청노조의 점거농성에 윤석열 정부가 보이는 반응이다. “노든 사든 불법은 방치되거나 용인되어선 안 된다. 국민이나 정부나 다 많이 기다릴 만큼 기다리지 않았나.” 대통령의 19일 출근길 발언이다. 집권당 임시대표 권성동은 한술 더 떴다. “정부는 더이상 주저하지 말고 법과 원칙에 따라 불법에 엄정 대응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치외법권 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19일 원내대책회의 공개발언) 사회적 갈등을 조율하고 중재해야 할 정치인 입에선 결코 나와선 안 될 말이다. 사법기관도 아닌 집권당 수뇌부의 인식이 어쩌면 저리 무모하단 말인가.
그 무모함은 타인의 행동을 ‘합법’과 ‘불법’의 눈금만으로 판단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들이 볼 때 하청기업에 고용된 자들이 원청기업에 이런저런 요구를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원청기업에 말을 걸 자격은 법이 그 권리를 인정한 원청노동자들에게만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듯 법은 ‘자격 있는 자’와 ‘자격 없는 자’를 구분하고, 후자의 목소리를 ‘사람의 말’이 아닌 ‘들려도 이해되지 않는 소음’으로 간주해 인지와 공감의 영역 바깥으로 밀어낸다. 그들의 존재 자체를 감각의 세계에서 지워버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최안과 하청노조지회의 ‘도크 점거’는 존재가 지워진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 ‘난입’이었다.
‘난입’의 사전적 의미는 “허가 없이 함부로 뛰어듦”(<표준국어대사전>)이다. 눈길을 끄는 건 뜻풀이에 따라붙는 용례 소개다. “그는 폭도들의 난입을 막다가 부상했다”(<고려대 한국어대사전>). 난입이라는 행동의 주체를 ‘폭도’로 적시해 그것이 자격 없는 자, 무법자의 난동이란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윤석열, 권성동의 인식과 판박이다. 우리 사회의 평균 인식이기도 하다. 이 관점에서 본 난입은 금지와 제재의 대상이다. 문제는 난입을 하지 않고선 ‘있음’ 자체를 드러내기 힘든 이들이 우리 곁에 넘쳐난다는 사실이다. 유최안과 하청노동자들의 처지가 정확히 그러하다.
다행히도 ‘유최안들’의 난입은 작지만 소중한 효과를 빚어내고 있다.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가 움직이고 정치권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지난 18일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유최안과 조합원들이 농성 중인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서문 앞에서 ‘연대 미사’를 열었다. 미사 참석자들이 든 손팻말에는 “여기 사람이 있다”라는 낯익은 문구가 적혀 있었는데, 이 말은 원래 2009년 용산참사 당시 불타는 망루를 바라보며 절규하던 철거민의 것이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평범한 시민들 다수가 조선업 하청노동자의 존재와 처지를 인지하고 연민과 공감의 시선을 품게 됐다는 것이다. 23일엔 파업을 지지하는 시민 2000명을 태운 희망버스가 거제로 떠난다. 그들을 불러모은 건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고 절규하듯 되묻는, 살아 있는 사람의 생생한 목소리다. 그러니 우리, 멀리서라도 말하자. 거기, 사람이 있다고.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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