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딸이 제 개인정보를 이용해서 카드 대출 총 5300만원을 받았습니다. 한 달 160만원을 버는데 360만원을 대출 갚는 데 쓰게 생겼습니다.”
시각장애인 안마사로 일하는 ㄱ씨는 13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대출금을 갚을 길이 없어 가정이 파탄 날 지경이라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ㄱ씨 명의 핸드폰을 사용하는 딸이 몰래 카드사 앱을 이용해 핸드폰 본인인증, 카드 비밀번호 등을 입력하고 지난 7월부터 두 개 카드사를 통해 각각 2300만원, 3000만원을 빌리면서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오르게 생겼기 때문이다.
ㄱ씨는 “요금 연체로 자신 명의로 핸드폰을 개통할 수 없는 딸을 위해 제 명의로 핸드폰을 개통해줬는데, 이를 카드 대출에 악용할 줄을 몰랐다”며 “카드사에서 경찰에 명의도용으로 딸을 신고하고 확인증을 제출하면 상환 기간을 늘려주고, 이자를 낮춰준다기에 눈물을 머금고 딸을 신고했다가 일주일 만에 취하했다. 아버지로서 도저히 딸이 경찰 조사를 받는 것을 볼 순 없었다”고 했다. 해당 카드사들은 본인확인 절차를 전부 거쳤기 때문에 자신들의 책임은 없다는 입장이다.
최근 비대면 본인확인을 통한 금융거래가 늘어나면서 ㄱ씨처럼 명의도용 피해를 보는 경우가 빈번하게 생기고 있다. 시민단체는 카드사를 포함한 금융사들이 비대면 본인확인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은행이 지난 3월 발표한 ‘2021년 중 국내은행 인터넷뱅킹서비스 이용 현황’을 보면, 지난 2021년 모바일뱅킹을 포함한 인터넷뱅킹을 이용해 대출신청서비스를 이용한 건수는 3만1000건, 금액은 7545억원으로 지난해에 견줘 47.6%, 56.9%가량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비대면 금융거래가 늘어나면서 명의도용 관련 피해 사례도 많아지고 있다. 배진교 정의당 의원이 지난 4월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금감원에 접수된 비대면 계좌 개설 관련 민원은 2016년 106건에서 지난해 414건으로 4배 가까이 늘었는데, 이 기간 은행계좌 명의도용 관련 민원도 122건에서 298건으로 2.4배 증가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구체적인 통계로 집계되진 않지만, 비대면 금융거래가 늘어나면서 금감원에도 일주일에 1∼2건씩 ㄱ씨와 비슷한 사례 신고가 접수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ㄱ씨처럼 비대면 금융서비스로 인한 명의도용 피해를 봐도 구제받기는 쉽지 않다.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금융회사가 본인확인조치를 소홀히 해 명의도용 대출 등이 발생할 경우 금융회사가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하지만, 일반인들이 민사소송을 통해 명의도용을 당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비대면 본인확인 가이드라인에 따라 공동인증서, 기존계좌 활용 등을 거쳐 본인확인을 했을 경우 금융사의 책임은 면책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시민단체는 금융사들이 비대면 본인확인 절차를 책임지고 강화해야 한다며 명의도용 피해자가 민사소송을 통해 구제받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한다. 정호철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간사는 “금융사들은 비대면 본인확인 절차를 간소하게 해 생기는 피해를 소비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신분증 원본 대조 확인이 가능하도록 하는 등 비대면 본인확인 과정을 고도화하려는 기술투자에 나서 피해를 예방해야 한다”며 “정부도 경찰, 금감원, 소비자원, 금융회사가 참여하는 ‘금융기관 조정 기구’를 설치해 피해자들이 일일이 소송비용을 부담할 필요가 없게끔 제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고병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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