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추행을 당한 피해자 같지가 않다’는 이유 등으로 무죄를 선고한 판결에 대해 대법원이 다시 판단하라며 사건을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원심의 판단을 “잘못된 통념”이라고 지적하며 12쪽에 달하는 판결문에서 조목조목 반박했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ㄱ(70)씨 사건을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인천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8일 밝혔다.
ㄱ씨는 2019년 1월 채팅앱을 통해 알게 된 피해자 ㄴ씨를 강제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ㄱ씨는 “여기는 너무 추우니 국가대표 감독을 한 적 있는 나를 믿고 모텔에 가자”며 피해자를 모텔로 데려가 성추행한 혐의를 받았다.
유일한 직접증거가 피해자 진술뿐인 상황에서, 1심은 ㄱ씨의 혐의를 유죄로 보고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으나 항소심은 ㄱ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의 태도가 강제추행 피해자라고 하기엔 수긍하기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항소심 재판부는 그 근거로 ㄴ씨가 별다른 거부 없이 처음 만난 ㄱ씨와 모텔에 들어간 점, 모텔에서 나와 ㄱ씨의 차를 타고 자신의 차량이 있는 곳까지 함께 이동한 점 등을 들었다. 추행행위에 대한 ㄴ씨의 묘사가 일관되지 않고, ㄴ씨가 사건 발생 이튿날에야 경찰에 신고한 점도 무죄의 근거로 쓰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원심이 무죄의 근거로 들었던 판단에 대해 12쪽 분량 판결문으로 조목 배척했다. 대법원은 “피해자의 진술은 주요한 부분이 일관되고 구체적”이라며 “통상의 성폭력 피해자라면 마땅히 보여야 할 반응을 상정해두고 통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합리성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논리와 경험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 볼 수 없다”고 했다. 2018년 10월 성폭력 사건 상고심에서 제시된 대법원의 법리를 재확인한 것이다.
대법원은 피해자의 여러 정황상 진술의 신빙성이 있다고 봤다. 고령의 피고인이 ‘춥다’며 모텔에 가자고 해 제안에 응한 것이라는 ㄴ씨의 진술에 대해 “피고인과 피해자의 나이 차이, 피해자의 심리 상태 등에 비춰 피해자의 행동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고 판단했다. 모텔에서 나와 함께 차를 탄 행위도 “갑작스레 심한 추행을 당해 극도로 당황하고 두려움과 수치심을 느끼게 된 상황이었다면, 피해자가 홀로 모텔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ㄱ씨의 차를 탄 점이 매우 이례적이라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고 봤다. ㄴ씨의 지능지수(IQ)가 72로 낮고 이 사건 무렵 사기를 당하는 등 심리적으로 고립된 상황에 처해 있었던 점, ㄴ씨가 친구에게 피해사실을 알리면서 경찰 신고를 망설인 이유로 “ㄱ씨는 돈이 많아 경찰에 돈 써서 풀려날 것 같다”고 설명하며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는 사정도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한다고 판단했다.
판결문에는 성폭력 피해자가 처한 상황마다 대처 양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 상세히 설시됐다. 대법원은 “피해자는 본격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게 되기 전까지는 피해사실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고, 가해자와 종전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피해 상황에서도 가해자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일정 수준의 신체접촉을 용인했더라도 자신이 동의한 범위를 넘어서는 신체접촉을 거부할 수 있고, 피해 상황에서 명확한 판단이나 즉각적인 대응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며 “성폭력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나이, 성별, 지능이나 성정, 사회적 지위와 가해자와의 관계 등 구체적인 처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현복 대법원 공보연구관은 “이번 판결은 ‘성폭력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할 때 기존의 잘못된 통념을 극복하고 피해자가 처한 상황에 기초해 판단해야 한다’는 법리를 보다 구체화해서 판시했다. 향후 유사한 사건 판단에서 하급심에 대한 지침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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