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억원을 횡령한 뒤 필리핀으로 도주한 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 직원 ㄱ(44)씨를 붙잡기 위해 경찰이 여권 무효화 신청을 한 지 2주가 지났지만 여권 효력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죄를 지어 국외로 도피 중이더라도 여권 효력 무효화 절차에 한 달 이상 걸려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0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김상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외교부로부터 받은 답변서를 보면, 건보공단 직원 ㄱ씨의 여권 중지 절차는 현재 진행 중으로 아직까지 사용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외교부는 “9월27일 강원도경찰청으로부터 건강보험공단 횡령 직원에 대한 여권제재요청을 접수하고, 관련 법령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범죄 피의자인 ㄱ씨의 여권이 사용가능한 것은 여권 무효화 절차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여권법상 피의자의 여권 효력을 중지하려면 당사자에게 여권을 반납받는 절차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외교부는 △여권 행정제재 여부 자체 검토 △여권 반납 결정 통지서 등기우편으로 1·2차 발송 △송달 실패 때 외교부 누리집에 14일간 공시 같은 4단계 절차를 밟아야 한다.
가상자산 루나와 테라 폭락 사태로 수사를 받는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도 현재 여권 효력 중지 조처가 진행 중이다. 지난달 15일 검찰의 여권 무효화 신청을 받은 외교부는 약 20일이 지난 이번 달 5일 외교부 누리집에 여권 반납을 명하는 공시를 했다. 공시가 올라온 뒤 2주 이내로 재외공관 등에 반납되지 않으면 권 대표의 여권은 오는 19일 자동으로 효력을 잃는다. 경찰 관계자는 “외교부에 여권 무효화 신청을 하면 통상 한달 반 정도 걸리는데, 국외에 있는 사람에게 등기우편을 보내는 절차는 큰 의미가 없다”며 “보통 피의자가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재도피하는 중 검거되는 경우가 많아 (여권) 관련 조처가 보다 신속히 이뤄지면 수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특히 피의자가 중범죄를 저지른 정황이 유력할 경우 국외 도피가 확인되면 여권 무효화 절차를 간소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김상희 의원은 “국외로 도피한 자에게 등기우편은 왜 보내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며 “중대한 범죄의 경우 외교부가 신속하게 여권의 효력 정지를 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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