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중계기’ 아르바이트를 하던 ㄱ(21)씨가 지난달 29일 경북 경주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ㄱ씨는 한달에 300만원을 준다는 제안을 받고, 한달동안 ‘번호 변작 중계기’를 소지한 채 시내버스로 대구·광주 등을 돌았다. 경찰청 제공.
고액 아르바이트 공고에 혹했던 ㄱ(21)씨는 010으로 발신번호를 변환하는 ‘번호 변작 중계기’를 가방 안에 넣고 시내버스를 타고 떠돌다 지난달 29일 경북 경주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ㄱ씨는 한달에 300만원을 준다는 제안을 받고, 한달동안 중계기를 소지한 채 시내버스로 대구·광주 등을 돌았다. 주로 전화금융사기 범죄에 악용되는 중계기 단속을 피하기 위해 이른바 ‘인간 중계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스미싱(문자 사기) 피해 신고를 받고 추적하던 경찰에 한 달만에 덜미를 잡혔다.
최근 ‘번호 변작 중계기’를 활용한 전화금융사기 범죄 수법이 나날이 진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주의가 요구된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올해 들어 1만1821대의 번호 변작 중계기를 적발했다고 18일 밝혔다. 지난해 같은 기간 적발한 2148대보다 5배 넘게 증가한 것이다. 번호 변작 중계기는 070으로 시작하는 인터넷 전화번호를 010로 시작하는 휴대전화 번호로 바꾸는 기계다. 사기 조직에서 대부분 070 번호는 전화금융사기나 스팸 전화라고 생각해서 잘 받지 않지만 010으로 시작하면 저장되지 않은 번호라도 일단 받는다는 심리를 활용해 전화 응답률을 높이기 위해 이를 활용한다.
중계기는 보이스피싱뿐 아니라 ‘스미싱 범죄’에도 활용된다. 중국 등 해외에서 발신한 문자가 010으로 시작하는 전화번호가 보낸 문자메시지로 둔갑해, 원격제어 앱 설치를 유도해 계좌 이체를 하는 등 추가 범죄로 이어지는 것이다. ‘엄마 나 휴대전화 액정 깨졌어. 친구 번호야’와 같은 스미싱 문자메시지가 대표적이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야산 중턱에 묻어놓은 변작 중계기. 경찰청 제공
경찰은 지난해 2월 경찰청 내 ‘전기통신금융사기 수사상황실’을 설치해 번호 변작 중계기 등 8대 필수 범행수단 집중단속을 벌여왔다. 적발 건수가 급증하자, 최근에는 중계기 형태를 교묘하게 바꾸거나 이를 은닉하는 방법도 진화해왔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김종민 경찰청 경제범죄수사과장은 “유에스비(USB) 포트 형식이거나 태양광 패널, 무선 라우터(네트워크간 연결 기기), 이동형 대형 배터리를 연결하는 새로운 형태가 계속 발견되고 있다. 중계기 공급·유통조직에 통신기술 분야의 전문가들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계기를 은닉하는 장소도 모텔이나 주거지에서 △산속 중턱 △폐건물 옥상에 태양광 패널과 연결 △고가 밑 땅속 △건설현장 배전 설비함·건설 중인 아파트 환기구 내부 △수풀 속 등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차량이나 오토바이를 활용하거나, 사람이 가방 안에 넣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인간중계기’도 등장했다.
경찰은 집중단속 결과, 올해 들어 전화금융사기 피해가 크게 줄어들었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한 달간 전화금융사기 피해 건수가 1289건으로, 피해액은 316억원을 기록했다. 피해액은 2018년 6월 286억 원을 기록한 이래 4년 3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치다. 지난 1~9월 전체로 봐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발생 건수(1만7376건)가 29%가량 줄었고, 피해액(4404억)도 1734억원 감소했다.
장나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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