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오전 김아무개(26)씨는 결혼을 준비하며 지출이 많아지자 인터넷카페에 카드 설계사를 추천해달라는 글을 올렸다. 본인을 카드 설계사라 소개한 ㄱ씨가 곧장 “연회비 및 현금을 지원해주는 카드를 발급해주겠다”는 쪽지를 보냈다. 김씨는 카드 발급을 위해 ㄱ씨에게 주민등록번호와 신용등급 등 개인정보를 건넸다.
그러나 이날 낮 1시30분께 리셀(재판매) 플랫폼 ‘크림’에서 모두 약 280만원이 결제됐다는 카드사 알림이 연달아 세차례 울렸다. 크림은 네이버 손자회사로, 한정판 패션 잡화 등의 재판매를 중개하는 플랫폼이다. 김씨는 인근에 있는 경기 남양주경찰서에 신고한 뒤, 카드사에 결제 취소를 요청했다. 그러나 카드사에서는 “‘카드사의 임의 판단으로 가맹점(크림)에 피해를 줄 수 없다’는 규정이 있어 결제 취소를 해줄 수는 없다고 답했다. 대신 카드사는 크림에 공문과 구두로 결제 취소를 요청했다.
크림은 김씨와 카드사, 경찰의 요청에 모두 “결제 취소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김씨는 “배송이라도 지연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크림의 이용 약관 제25조 7항을 보면, “도난 카드의 사용이나 타인 명의의 주문 등 정상적인 주문이 아니라고 판단될 경우 임의로 주문을 보류 또는 취소할 수 있다”고 돼있다.
김씨는 결국 직접 ‘가짜 카드 설계사’를 찾아나섰다. 김씨가 사기 피해자 카페를 뒤져보니 김씨와 비슷한 피해를 당한 ㄴ씨가 있었다. 알고보니 ㄴ씨도 이미 ‘가짜 설계사’에게 같은 수법으로 450만원가량의 피해를 입었다. ㄴ씨는 크림에 결제취소를 요구하는 민원 전화를 했다가 ‘전화를 차단당했다’고도 했다.
결국 가짜 설계사와 연락이 닿은 김씨와 ㄴ씨는 고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협상을 시작했다. ‘고소를 취하한다는 자필 각서와 서명을 먼저 써주면 피해금액을 입금해주겠다’고 요구했다. 김씨와 ㄴ씨는 결국 사기를 친 ‘설계사’에게 각서를 써주고 나서야 피해 금액을 전액 돌려받을 수 있다.
27일 김씨는 <한겨레>에 “경찰과 카드사, 크림에 모두 피해를 막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결국 사기범을 찾고 돈을 돌려 받은 건 피해자들이었다”며 “특히 경찰과 카드사를 통해서 범죄 피해 사실을 알리고 결제 취소를 요청했는데 ‘결제취소나 배송지연은 안 된다’고 했던 크림 쪽의 대응이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크림 관계자는 “수사 결과가 확실히 나와서 김씨의 명의가 도용됐다는 사실이 확정됐다면 결제 취소를 했겠지만, 경찰에 신고가 됐다는 사실만으로 결제 취소를 할 수는 없다”며 “플랫폼 특성상 거래가 보류·취소 되면 리셀 상품 가격 변동에 영향을 주는 등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크림과 유사한 다른 리셀 플랫폼은 카드 명의 도용을 막기위해 구매자와 결제 카드 명의가 다를 경우 아예 결제를 못하게 하고 있었다. 리셀 플랫폼 ‘무신사 솔드아웃’ 관계자는 “구매자가 상품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카드를 필수적으로 등록해야하는데, 계정 명의와 카드 명의가 다를 경우 등록이 아예 불가하다”며 “현재까지 카드 명의도용 등으로 인한 환불요청이 단 한차례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서울의 한 일선 경찰서 수사과장은 “설계사로 접근해 명의도용한 것은 잘 보지 못한 범죄 수법”이라며 “피해자 입장에서는 속기도 쉽고 바로 피해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개인정보를 넘기기 전에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고소를 취하했지만, 처음 김씨 신고를 받은 남양주경찰서는 사건을 피의자의 주거지 인근인 울산 남부경찰서로 이송했다. 경찰은 타인의 신용카드 명의를 도용해 결제한 ㄱ씨 혐의(여신전문금융업법 위반)이 친고죄에 해당하지 않아 계속 수사한다는 방침이다.
채윤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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