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맨 왼쪽) 등이 지난 2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방문, 조문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등학생이던 세월호 때는 배가 침몰하는 것 같으면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따르지 말고 무조건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걸 배웠죠. 그리고 20대 중반이 된 지금은 사고가 나면 거기를 간 내 책임이니 밀집한 곳에 가면 안 된다는 걸 배웠어요. 그럼 국가는 뭐 하는 것인가요? 그런데 이런 말 하기도 꺼려집니다. 네가 선택한 걸 왜 국가 탓을 하냐며 욕먹을 테니까요.”
이태원 참사가 있고 난 다음 몇명의 이십대들과 나눈 이야기를 종합하면 위와 같은 이야기가 된다. 공교롭게도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동료 학생들의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국가에 대해 불신했던 학생들이 다시 또래들이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것을 보며 국가를 넘어 사회의 존재 이유에 대해 부정하고 있었다. 더 강화된 것은 “자기를 지키는 것은 자기뿐”이기 때문에 “자기가 알아서 판단”을 해야 한다는 확신이고 달라진 점은 “그 판단에 대한 책임도 자기가 져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질타를 당한다는 의식이 더 강해졌다는 점이다.
이번 참사를 겪으며 그들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쉽게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악마화”하는지를 경험했다며 몸서리쳤다. 100m가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춤을 출 수 있냐는 비난에 대해 당신이라면 그 상황에서 ‘그런 판단’을 하는 게 가능한 것이냐고 반문했다. 축제이고, 사람들이 혼잡하고, 다수가 코스튬을 하고 있는 곳에서 명확한 안내방송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게 ‘비상 상황’인지, 발 빠르게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냐는 말이다. 그 장소 인근에서 춤을 춘 사람, 술을 마신 사람, 지나간 사람, 무슨 일인지 모르고 있던 사람, 모두가 다 악마가 되고 죄인이 되었다.
“사람이 죽고 있어요. 도와주세요. 제발!”을 확성기 하나 없이 쉰 목소리로 절규하던 이태원의 경찰관에게나 음악에 묻혀 그게 무슨 말인지를 판단할 수 없었던 지나가는 행인들에게나, 그곳은 시스템이 부재하는 절망의 장소였다. 한쪽은 지금 죽어가는 사람들을 두고 확성기로 상징되는 시스템이 부족하였기에 ‘개인’으로서의 자기의 역량이 부족함을 절감하며 무력감에 무너져갈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쪽은 그 소리가 무슨 말인지를 모르고 지나갔다는 사실, 그 사실을 이후에 알게 된 다음 밀려오는 죄책감에 몸을 떨며 무너져가고 있다. 한쪽은 의인이고, 한쪽은 악마인가. 아니면 두 쪽 모두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현장’의 피해자들인가?
반면 그 자리에 대해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있다. 그 자리가 성공적이었다면 그 성과를 자신의 치적으로 가져갔을 사람들이다. 코로나를 드디어 극복하고 일상을 회복하였다거나, 혹은 지역 상권을 다시 살리는 데 기여한 지자체라는 이름과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이들은 사고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일종의 ‘부재지주들’이다. 이 부재지주들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악마화하여 그 죄를 따져묻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들이 하는 게 아니라 대중이 나서서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일이 벌어졌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죄인이 되어갔다.
권력을 가진 이 부재지주들은 ‘권한’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질 책임이 없으며 불가피한 사고였다고 말한다. 그럴듯하다. 그들은 아무런 책임을 질 수 없다. 왜냐하면 사건의 전후로 어떤 것도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산구청장의 말처럼 이번 사건은 주체가 있는 ‘행사’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이었기 때문에 이 부재지주들은 현상이 발생하고 흘러가는 대로 구경만 했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책임질 일도 없다. 애초에 책임질, 즉 결정을 하지 않았으니 질 책임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시민들은 매우 근본적인 것을 물을 수밖에 없다. 책임질 ‘결정’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왜 시민은 권력을 위임해야 하는가? 위임받은 권력으로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만일 책임이 이리 정해진(=결정된) 지침과 매뉴얼에 따라 착실히 수행하는 것의 여부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면 우리는 선거라는 정치적 행위를 할 이유가 하등 없다. 선거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은 정책을 결정하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질 사람을 뽑는 정치적 행위이지 행정적 절차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거로 뽑히고, 선거 승리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정치적 과정’으로 임명되어 막강한 권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법적·행정적 책임’이라는 말로 뻔뻔하게 정치적 책임을 무책임하게 부정할 때 시민들은 황당함을 넘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들은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그들은 사실은 ‘결정하지 않는 결정’을 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책임과 달리 정치는 결코 결정을 피해갈 수 없다.
더하여 행정적 책임이라도 제대로 수행하였냐면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112 신고 녹취록이 공개된 후 매뉴얼과 권한이 없다던 초기의 변명과는 달리 매뉴얼대로 진행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권한이 없던 것이 아니라 보고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해야 할 의무와 임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것이다. 시민들이, 일선 경찰들이, 파출소가 상황에 대해 급박하게 보고를 하며 대처할 것을 아무리 요청하여도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은 것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이 부재지주들이었다.
전국민중행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여성단체연합,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노동·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3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이태원 참사 시민사회여론동향 문건’에 대해 ‘사찰 행위’로 규정하고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경질을 촉구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참사의 전후로 정치적 판단과 책임만 부재한 것이 아니라 행정적 판단과 책임도 부재했다. 오히려 이제야 다시 드러나고 있지만 상황 판단이 되는 대로 최선을 다해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현장에 있던 다수의 사람들이었다. 이벤트가 아니라 진짜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을 감지하자마자 업소 주인들은 손발을 걷고 뛰어나가 도왔다.(그런데 경황없이 뛰어나간 이들은 음악을 끄지 않았다고 비판받고 있다.) 지나가던 간호사·간호조무사 자매는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가서 3시간 넘게 30~40명에게 심폐소생술을 했다. 권력과 시스템의 판단과 행동이 부재한 곳에서 판단하고 행동한 것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죄책감에 몸부림을 치며 파괴되어 가야 하는가?(이런 점에서 지금 이들의 정신적 트라우마 극복을 돕기 위해 정신의학 치료·상담을 진행하는 일선의 분들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한국은 참사가 있을 때마다 정치의 부재, 행정의 부재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 공백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뼈를 갈아넣어 버텼지만 그 한계치에 도달했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버틸 수는 없다. 물론 한국의 시민들은 이 부재를 메꾸기 위해 나서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부재는 행정적인 판단과 책임을 포괄하는 결정을 내리고 책임지는 정치의 회복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장에 책임을 물으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죄책감을 먹이 삼아 빠져나가려는 저 책임의 부재지주들을 권력으로부터 내보내야 한다. 현장을 보호하고 부재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권력이 부재지주가 되는 것을 용인해서는 정치와 행정 모두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이 책임을 ‘지는’(‘묻는’ 것이 아니라) ‘무한책임자’가 필요하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