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같은 사람이 가득한 세계에 ‘언어’가 필요할까

등록 2022-12-03 19:26수정 2022-12-03 23:51

[한겨레S] 양다솔의 저도 말해도 될까요
반알고리즘적 인간​
사진은 본문과 관련 없음.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은 본문과 관련 없음. 게티이미지뱅크

☞한겨레S 뉴스레터 무료 구독. 검색창에 ‘에스레터’를 쳐보세요.

언젠가 엄마와 단둘이 한달을 산 적이 있다. 엄마와 떨어져 산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함께 있는 내내 느꼈던 것은 반가움이나 행복이기 전에 ‘불통’이었다. 엄마인데 말이 안 통했다. 그건 생각지도 못한 장벽이었다. 우리에겐 어서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었다. 내가 평소에 말하는 속도와 크기, 톤과 뉘앙스가 엄마에게 불친절한 언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일단 귀가 어두운 엄마는 내가 한번 말해서 제대로 알아듣는 경우가 없었다. 나는 필수적으로 어떤 말을 두번 이상, 소리치듯 반복해야 했다. 택시를 불러야 하는 순간에 엄마한테 “카카오 티 부르면 되겠다”라고 했다가 그 자리에서 카카오 티가 뭔지 설명하고 그걸 설치하고 아이디를 만들어 가입해주느라, 그럴 시간에 걸어갔으면 거기 이미 도착했을 시간이 되어 있기도 했다.

엄마가 평소에 어떤 콘텐츠를 즐기며 사는지도 처음 알게 되었다. 귀가 안 좋고 음악을 좋아하는 우리 김 여사는 매일같이 찐득한 이별 발라드곡을 핸드폰 볼륨 최대로 틀어놓고 일상을 살았다. 평소에 대부분 적막 속에 사는 나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나 농담 같은 것들은 통하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니 평소에 쓰는 단어 중에 엄마가 알아들을 만한 것들이 없었다. 갑분싸, 꾸안꾸, 안물안궁, 혼코노…. 엄마와 내가 공통으로 즐기는 콘텐츠도 없었다.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단어가 엄마에게는 외국어처럼 생소했다. 우리는 한 몸을 공유하기도 했던 사이였지만 어느덧 세상 누구보다도 타인이 되어 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35년이 있었고, 엄마는 어느새 노인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나와 비슷한 사람만 만났는지

나는, 내가 얼마나 나와 비슷하고, 트렌드에 민감하고, 건강하고, 빠릿빠릿한 젊은 세대만 만나왔는지 실감했다. 나와 다른 세대, 다른 언어를 쓰는 존재에게 말하는 방법에 대해 한번도 고민한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일상에서 나와 다른 세대를 마주칠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서울 중심지에 위치한 우리 동네를 걸으면 어디나 나와 비슷한 사람들만 보였다. 이곳은 엄마 같은 노인이 배제된 ‘젊은이의 세상’이었다. 엄마에게 이곳의 질서와 언어는 모두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언젠가 내 세계를 건축한 장본인이었던 엄마는 동네에서 자꾸만 길을 잃었다. 나는 나와 엄마가 어떤 일을 함께 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엄마와 내가 이렇게 다른지 몰랐다. 불쑥불쑥 엄마와 불통하는 순간, 가장 먼저 들었던 감정은 놀랍게도 ‘귀찮음’이었다.

세상은 바야흐로 좋아하는 것만 보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나와 다른 존재를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 알고리즘은 입안의 혀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려준다. ‘말하지 않아도’ 나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더 잘 파악한다. 기분 나쁘고, 다르고, 불편한, ‘보기 싫은’ 것들은 손가락으로 ‘관심 없음’, ‘싫어요’를 누르는 것으로 쉽게 치울 수 있다. 시선은 초 단위로 나뉘어 기록되고, 클릭 몇번은 다음을 결정하는 근거가 된다. 결정할 것은 점점 더 줄어든다. 하나의 거대하고 확고한 선호를 만든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와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는 충돌과 불편함, 갈등은 사라진다. 그러다 어느 날 나와 완전히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말문이 막힌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내가 평소에 당연하게 생각해온 신념, 사용해온 언어들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럼 우리는 어디서부터 말하기 시작해야 할까.

‘다름’에 대답하며 ‘내’가 된다

어릴 적부터 어디서나 눈에 나는 행동을 했던 나는 가는 곳마다 ‘왜’가 따라붙었다. 왜 학교에 안 가? 왜 그렇게 입고 다녀? 왜 그따위로 말해? 사람들은 내 일거수일투족에 질문을 쏟아냈다. 예의가 없고 개념이 없다고 단정 지었다. 어디를 가나 시간이 지나면 무리에서 배척당했고 이상한 존재로 낙인찍혔다. 뜨거운 관심과 분노로부터 비롯된 그것은 질문처럼 보이는 비난에 가까울 때가 많았다. 사람들과 비슷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국에 살면서 질문을 받는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의 증거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내가 가만히 있어도 나를 이해해주는 존재가 별로 없었다.

나는 침묵하는 방법을 몰랐기에 그들의 질문에 답하려고 애썼다. 평생을 설명하면서 살았다. 그들은 답을 원하고 한 질문이 아닌데도 그랬다. 답하기 위해서는 생각해야만 했다. 나는 왜 이렇게 말할까, 나는 왜 이렇게 입을까, 나는 왜 이렇게 행동할까. 나도 내가 왜 그런지 알고 싶었다. 나의 첫 책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은 그런 질문으로 시작된 글들이 대부분이다. 공격과 같은 수많은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들에게 경도되기보단 더욱 구체적으로 내가 되었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과 충돌하는 일이 나를 더욱 새롭게 보게 만들었다. 나 스스로 나를 설명하는 언어를 찾게 해주었다. 내가 나를 정확한 언어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과 ‘다른’ 나도 존재해도 된다는 권능감을 주었다.

지금의 엄마와 지금의 나를 잇는 언어를 찾는 고민이 ‘귀찮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는 두려워졌다. 언젠가 ‘나’와 다름없이 느껴졌던 엄마와 대화하는 것조차 힘들다고 느낀다면, 나는 과연 누구와 언어를 공유할 수 있을까. 삶의 모든 부분이 알고리즘화되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번도 나와 다른 사람을 마주치지 않고, 길을 잃어보지 않는다면 어떨까. 다른 언어를 마주치고 고민하고 깨어지고 다시 설명하는 모든 과정이 ‘싫어요’와 ‘관심 없음’으로 해결될 수 있다면. 서로가 서로의 ‘관심 없음’이 된다면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상대는 누가 남을까. 사람들은 각자의 화면을 들여다보느라 바쁘다. 세상은 고요하다. 나는 궁금해졌다. 나와 같은 사람으로 가득한 세계에 과연 언어가 필요할까, 하고.

양다솔

글 쓰고 말하는 사람이다. 에세이집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유료 뉴스레터 ‘격일간 다솔’을 발행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이종섭의 ‘자백’, 윤석열 대통령을 향한다 [논썰] 1.

이종섭의 ‘자백’, 윤석열 대통령을 향한다 [논썰]

의대 정원 최대 1000명 줄어들 듯…결국 물러선 윤정부 2.

의대 정원 최대 1000명 줄어들 듯…결국 물러선 윤정부

봄 맞아 물오른 버드나무 40그루 벤 뒤…5만평 모래톱 쑥대밭으로 3.

봄 맞아 물오른 버드나무 40그루 벤 뒤…5만평 모래톱 쑥대밭으로

“봄인데 반팔...멸종되고 싶지 않아” 기후파업 나섰다 4.

“봄인데 반팔...멸종되고 싶지 않아” 기후파업 나섰다

홍세화 “지금 자유롭습니다”…산소줄 빌려 숨 모은 말들 5.

홍세화 “지금 자유롭습니다”…산소줄 빌려 숨 모은 말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