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한 상가 건물에 붙어있는 피난구유도등. 곽진산 기자
“왼쪽으로 가라는 거 아닌가요? 그냥 저기가 입구란 뜻인가. 헷갈리네요.”
서울 서초구의 한 상가에서 세탁업을 하는 서상원(52)씨는 최근 ‘녹색 유도등이 어디를 안내하는 것 같냐’는 물음에 대해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서씨는 “화재 등 비상시에는 깜깜한 상황에서 저 유도등만 보고 이동해야 하는데 순간적으로 헷갈릴 수 있겠다 싶다”고 말했다.
‘달리는 남자’ 모습의 녹색 유도등은 화재나 홍수 등 재난 시에 대피 경로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건물에 필수로 설치되는 등이다. 1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1972년 일본 센니치 백화점 화재 사건에서 당시 유도등이 비상 출구를 제대로 안내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되면서, 이른바 ‘런닝맨’ 표지판이 일본에서 만들어져 상용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1987년 현재의 픽토그램(그림문자)이 국제표준화(ISO)된 뒤 36년째 널리 쓰이고 있다.
설치된 위치에 따라 피난구유도등, 통로유도등, 객선유도등으로 나뉘는 유도등은 비상 출구의 특징을 한눈에 보여주기에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지적은 계속해서 나온다. 통로유도등에는 화살표가 함께 표시되기도 하지만, 피난구유도등의 경우 지시 방향을 따로 표기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마치 ‘왼쪽으로 가라’란 뜻으로 읽힐 수 있어서다. 11일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서 근무하는 김아무개(31)씨는 <한겨레>에 “평소 유도등의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이 전방에 직진 출구가 있는데도 왼쪽으로 가곤 한다”며 “만약 화재가 발생한 지점이 왼쪽이라면 사람들이 유도등을 보고 불이 난 쪽으로 달려가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서울 시내에 건물들에 붙어 있는 비상구 유도등. 이 유도등에는 방향 표시가 없다. 곽진산 기자 kjs@hani.co.kr
지난달 말 이틀간 강남구·서초구·송파구 등에서 상가 빌딩과 지하상가, 회사 건물 등을 무작위로 30여곳을 확인해 보니 명확하게 출구 방향을 확인할 수 있었던 피난구유도등은 단 한곳도 없었다. 일부 통로유도등에만 화살표가 함께 표기돼 있었다.
유도등 디자인에는 별다른 제약은 없다. 화살표를 포함해 제작할 수 있고 왼쪽으로 달리는 모습을 우측으로 반전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실제 대다수 유도등은 방향 표시가 없는 정사각형의 그림이 기본 모델로 사용된다.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이런 유도등을 ‘무방향 유도등’으로 판매 중이다.
실제로 2021년 한국화재소방학회지에 실린 ‘유도등 픽토그램 개선 방안에 관한 연구’ 논문을 보면, ‘런닝맨’ 유도등에 화살표 지시를 덧붙이면 유도등의 이해도가 높아진다고 지적했다. 해당 설문에서 소방대원 45명 중 37명(82%)이 화살표와 함께 표기된 경우 유도등의 방향을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조사됐다. 정종진 소방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논문에서 “국내의 유도등에도 ‘런닝맨’과 화살표를 함께 사용하는 것이 재난시 보다 더 빠른 대피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며 “화살표의 방향도 좌우상하뿐 아니라 여러 각도의 화살표를 적극적으로 표기해 피난통로의 위치를 보다 명확하게 안내해 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염건웅 유원대 교수(경찰소방방재학)는 “통로를 안내하는 유도등과 달리 전방이 비상구임을 표기하는 비상구 유도등은 누군가는 한 눈에 봤을 때 방향을 명확하게 인식하기 어려울 수 있다. 판단력이 흐려지는 긴급한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며 “명확하게 방향을 알 수 있도록 개선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곽진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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