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가족부가 일방적으로 ‘청년 성평등 문화 추진단(버터나이프 크루)’ 사업을 중단했지만 올해 이 사업에 참가했던 17개팀 중 13개팀이 사회적 협동조합 ‘빠띠’의 지원을 받으며 ‘그럼에도 우리는’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10월22일 서울 성동구 헤이그라운드 서울숲점에서 ‘그럼에도 우리는’ 중간 점검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 빠띠 제공
30대 청년 대니(활동명·31)는 지난해 5월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진행한 ‘과학문화 전문인력 양성 교육과정’을 듣던 중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과학사학자인 정인경 고려대 과학기술연구소 연구교수 강의였다. 과학이라는 학문이 16세기 ‘서구 백인 남성들’에 의한 과학혁명에서 시작됐다는 이야기였다. 평소 성평등에 관심이 많았던 대니는, 그동안 남성의 기준과 시각에서 수행된 과학연구를 바로잡을 수 있는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을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그해 6월 ‘청년 성평등 문화 추진단(버터나이프 크루)’ 4기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니는 지인 5명을 모아 페미니스트 과학기술사회학 함께 알기 프로젝트팀 ‘에프에스티에스’(FSTS)를 꾸렸다. 여성가족부가 2019년부터 진행해온 버터나이프 크루 사업은, 성평등한 문화 확산을 목표로 하는 청년 활동을 정부가 지원하는 사업으로, 4기엔 에프에스티에스를 포함해 17개팀이 선정됐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에프에스티에스는 날벼락을 맞았다. 여가부가 지난해 7월5일 갑자기 사업을 전면 재검토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이 페이스북에 “지원 대상이 페미니즘에 경도됐다”며 “여가부 장관과 통화해 해당 사업 문제점을 전달했다”고 밝힌지 하루만이었다. 불과 5일 전,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4기 출범식에서 축사까지 했던 터였다. 결국 김 장관은 같은 해 8월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사업”이라며 폐지에 못을 박았다. 대니는 12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4년간 이어져 온 사업이 ‘전화 한 통’으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게 힘들었다”고 말했다.
버터나이프 크루 사업은 성평등을 원하는 청년들의 안전한 울타리였다. 이 사업을 여가부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했던 사회적 협동조합 ‘빠띠’의 장하은 활동가는 “그동안 매년 청년 100명 정도가 참여했다. 1기 때는 성평등, 주거, 가족, 일, 건강 등과 관련한 정책 제안서를 만들어 여가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청년들이 자신이 속한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직접 기획·실천하는 사업은 거의 없었다”며 버터나이프 크루를 평가했다.
사회적 협동조합 ‘빠띠’가 지난해 10월22일 서울 성동구 헤이그라운드 서울숲점에서 연 ‘그럼에도 우리는’ 중간 점검회에서 참가팀들이 서로의 프로젝트 개효와 진행 상황 등을 살펴보고 있다. 빠띠 제공
정부 사업은 중단됐지만, 청년들은 멈추지 않았다. 4기 참가팀 17곳 중 13개팀은 ‘빠띠’의 지원(총 약 6800만원)을 받아 ‘그럼에도 우리는’이라는 성평등 활동을 이어갔다. 에프에스티에스는 지난해 11월 페미니스트 과학기술사회학을 알리기 위해 정인경 교수와 책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의 저자인 임소연 동아대 교수를 초청해 온라인 강연을 진행했다. 참가자는 120명에 달했다. 대니는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보이는 과학이 실은 얼마나 성차별적이었는지 밝히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탐구하는 페미니스트 과학기술사회학은 시민들에게 꼭 필요한 관점”이라며 “앞으로 활동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스여일삶’(스타트업 여성들의 일과 삶)도 기획한 프로젝트를 완수했다. 2017년 11월 페이스북 커뮤니티로 시작해 회원 수가 6600여명에 달하는 스여일삶은 지난해 ‘스타트업 여성의 노무 고민 제보받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스타트업(창업기업)에서 일하거나 창업을 준비하는 여성이 일터에서 겪었던 고충의 해결 방안을 노무사와 함께 찾는 프로젝트였다. 약 3주동안 받은 제보는 20여건. 부당한 근로계약과 미사용 연차 유급휴가 수당 미지급, 회사 또는 협력업체 대표에 의한 성폭력 등 피해가 주를 이뤘다. 프로젝트 결과물은 지난해 12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 게시됐다. 김지영(34) 스여일삶 대표는 “업계가 좁다 보니 문제 제기를 못 하는 경우가 많다. 또 소규모 스타트업은 대표가 인사팀 업무도 병행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가해자가 대표인 경우) 성폭력 피해를 입어도 직장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또 “스타트업 여성들은 투자심사 과정에서 심사역들로부터 ‘결혼은 했냐’ ‘아이는 언제 낳을 거냐’ 같은 질문을 받고, 임신 때문에 불이익을 받고 있다”며 “스타트업 여성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는 활동을 앞으로도 지속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더 많은 스타트업이 젠더 감수성을 지닌 기업 문화를 갖도록 하는 것, 투자시장의 젠더 감수성을 높이는 일이 스여일삶의 목표다.
지난해 12월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성미산마을 회관 1층에서 ‘담롱’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상 상영회가 열리고 있다. 담롱 제공
2019년부터 페미니즘, 장애, 젠더퀴어(기존의 이분법적 성별로 분류할 수 없는 성별정체성), 기후위기 등을 주제로 한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는 ‘담롱’도 지난해 ‘여기선 안 된다 말했지만’ 프로젝트를 이어갔다. 수도권 외 지역에서 성평등하고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을 만나 다큐멘터리 영상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지난해 10∼12월 충북 청주와 대구, 전북 남원을 찾아 차례로 청주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걔네’, 대구 청소년 페미니스트 모임 ‘어린보라’, ‘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리산 여성회의’를 만났다.
‘담롱’의 배시은(26) 피디(PD)는 “처음엔 지역에서 페미니즘 커뮤니티를 형성하거나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도권 중심적인 사고였다”며 “(인터뷰를 하면서 들었던 말 중) ‘내가 사는 지역에 문제가 있다면 직접 바꾸고 그 지역에 살면서 페미(니즘 운동을) 하겠다”는 말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담롱’이 만든 영상은 이달 중 유튜브에 공개된다.
청년이 주도하는 성평등 활동이 계속될 필요가 있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대니는 “국가가 파악하고 해결할 수 있는 범위는 한계가 있다”며 “기성 사회의 사각지대를 포착하는 새로운 시각을 가진 청년이 주도한 활동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배 피디가 덧붙였다. “청년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재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런 프로젝트는 진행하기 어렵다. 앞으로 지원 사업이 많아졌으면 한다.”
정부가 손을 놓은 이들을 지원한 ‘빠띠’는 오는 14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2023 그럼에도 우리는 성평등 페스타' 행사를 연다. 이날 13개 참가팀의 활동 결과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빠띠의 박효경 활동가는 “차별과 혐오로 일상의 성평등이 위축되고 자유로운 활동이 위협받는 현실에서 각 팀이 멈추지 않고 활동했던 것처럼, 시민들에게 연대하자는 메세지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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