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삼(86)씨는 잠자다 남한 북파공작원드에 납치된 지 67년이 지난 지금도 ‘엄마’ 얼굴이 뚜렷이 기억난다고 했다.
열아홉살에 납치돼 온 아이는 여든여섯 노년이 됐다. 67년. 모질고 긴 세월이었다. 가족과 친구, 꿈과 젊음, 아니 한 번뿐인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세월이었다. 2023년 2월14일, 김주삼(86, 경기 고양시)씨는 변호사한테 법원의 판결 소식을 전해 듣고 만감이 교차했다. 평생을 숨죽인 채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 그리움 속에 살아온 지난날이 빛바랜 흑백영화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7부(재판장 박석근 부장판사)는 1956년 북한에서 한국의 북파 공작원들에 납치돼 끌려온 김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피고(국가)는 원고(김씨)에게 위자료 10억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국가가 김씨의)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행복추구권 등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권을 침해한 불법행위를 저질렀으며, 원고가 이로 인하여 심대한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고 인정했다. “가족들과 생이별했고, 강제노동으로 소중한 청춘을 희생당한 고통은 평생 치유될 수 없다”고도 했다.
잡역꾼으로 부렸다, 보수는 없었다
재판에서 국가는 김씨의 손해배상청구권 소멸 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국가 산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서 희생자로 규정한 이를 상대로 국가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에 해당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2013다16602)을 인용해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대한민국 법원이 북파공작원의 북한 주민 납치 사실과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월20일 <한겨레21>은 경기 고양시 김씨의 자택에서 김씨와 부인 이아무개씨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평상형 침대 하나가 놓인 좁은 거실과 작은 방 한 칸, 화장실이 딸린 14평형 영구임대 주공아파트였다.
김씨의 고향은 북한땅인 황해도 용연군 용연읍의 바닷가 마을이다. 황석영 소설 <장길산>의 장산곶매 이야기로 잘 알려진 장산곶이 서쪽으로 20㎞ 남짓. 남쪽으로는 바다 건너 한국의 최북단 섬인 백령도가 맨눈으로 보인다. 한국전쟁의 포화가 정전협정으로 멎은 지 3년이 지난 1956년 10월10일 늦은 밤, 당시 늦깎이 중학생이자 5남매의 장남이던 김씨는 동생들과 함께 잠들어 있었다.
“엄마는 없었어요. 병원 식당에서 일하고 잠도 거기서 잤거든. 낮에 집에 왔다갔다 하고. 우리끼리 자고 있는데, 갑자기 군인 세 명이 방에 들이닥쳐서 나를 깨우고는 ‘가자’ 그러는 겁니다. 총을 들이대고. 너무 놀라서 말 한마디 못했지요. 동생들도 잠이 깼을 텐데 무서워서 꼼짝 않고 있었겠지.”
1956년 북한 황해도 고향에서 남한 북파공작원에게 납치된 지 67년 만에 국가의 배상을 받게 된 김주삼(86)씨가 2023년 2월20일 경기도 고양시 자택에서 포즈를 취했다. 벽에는 김씨와 부인 이승자씨 부부의 젊은 시절 사진과 딸이 그린 고흐의 해바라기 정물화가 나란히 걸려 있다.
1956년 공군첩보대 “적지에서 아무나 납치해오라”
김씨는 컴컴한 해안에 대기 중이던 목선에 태워져 백령도로 끌려왔다. 말 그대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그로부터 가족과 영영 생이별이었다. 김씨는 지금도 어머니의 호칭을 ‘엄마’라고 불렀다. 느닷없이 사라진 장남을 가슴 속에 묻은 채 세상을 떠났을 모친이, 나이 아흔을 바라보는 그에게 여전히 열아홉살 소년의 ‘엄마’로 남아 있었다. “엄마 얼굴은 지금도 기억나지. 동생들은 가물가물해.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요.”
당시 국군 공군첩보대 백령도 파견대는 황해도 출신 청년들을 모집해 북파 공작원으로 훈련시킨 뒤 특수임무를 지시했다. “적지에 들어가서 아무나 납치해오라.” 공작원들은 야음을 틈타 북한 땅으로 잠입한 뒤, 바닷가 외딴 민가 서너 곳 중 한 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를 끌고 왔다. 김주삼씨의 평생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김씨는 백령도와 인천을 거쳐 서울 구로구 오류동 소재 군부대에 억류됐다. 한국 공군 첩보대와 미군 첩보부대의 공동 기지였다.
“부대에 끌려와서 조사를 받았어요. 학교 어디 다녔냐? 인민군 부대가 어디 있느냐? 다리가 어디 있느냐? 그런 것들만 자꾸 물어본 거지. 몇 년 동안 그렇게 갇혀 있었어요. 날짜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한국과 미국의 군 첩보당국은 중학생 김주삼에게서 군사정보를 빼내려 1년 가까이 번갈아 신문했지만 뾰족한 게 나올 리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돌려보낼 수도 없었던 첩보대는 김씨를 잡역꾼으로 부렸다. 처음 몇 개월간은 미군 첩보대에서 ‘쇼리(shorty, 꼬맹이)’로 불리며 구두닦기 같은 잡일을 했다. 이후 미군 부대와 한국군 첩보대가 통합운영하는 수송부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보수 따위는 없었다.
“중학생이라고 해도 아무것도 몰랐어요. 이 사람 저 사람이 시키는 심부름이랑 잡일 많이 했지. 밥은 부대 식당에서 먹었지.” 곁에 있던 부인 이승자(80)씨가 귀가 어두운 김씨를 대신해 거들었다. “제때 놓치면 밥도 제대로 못 먹었대요. 심부름이나 허드렛일을 하다 보면, 밥 나오는 시간이 있는데 늦게 와서 밥이 없으면 남이 먹다 남은 걸 먹고 그랬다고 해요. 말도 못하게 고생한 거지.”
김주삼(86, 오른쪽) 씨 부부가 2023년 2월20일 경기도 고양시 자택에서 부인 이승자씨와 힘겨웠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당시 이 부대 사병으로 복무했던 임 아무개씨가 2021년 진실화해위의 김주삼 납치 사건 진실규명 조사 때 참고인으로 진술한 대목은 이렇다.
“1956년 가을 무렵 부대 식당에 처음 보는 사람이 혼자 밥을 먹고 있는데 군인 같지는 않아서 알아보니 첩보대가 북한에서 납치해온 김주삼이었다. 당시 낮에는 조사를 받고 저녁에 들어와 내무반에서 잠만 같이 잤다.(…) 밤이면 몰래 나가 철망을 붙들고 우는 모습을 하도 많이 봐서, 딱하고 불쌍해서 (내가) 전역한 뒤에도 돌봐주었다.”
그렇게 5년가량 부대에 억류돼 있던 김씨는 1961년 느닷없이 부대에서 퇴출됐다. 자신의 경험을 절대 입밖에 내지 말라는 엄포와 함께. 혈혈단신 무연고자에다 남한 사회에 대한 지식과 정보라곤 전혀 없는 빈털터리였다. 거주지 주소는 황해도 용연군에서 서울 구로구 오류동으로 바뀌었다. 첩보부대 근처에 살던 수송대 문관이 자기 집 주소로 김씨의 임시 호적을 만들어 준 것이다.
김씨는 얼떨결에 대한민국 국민이 됐지만, 대한민국 어디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낯선 남한 땅에서 변변한 일자리 하나 구할 수 없었다. 관할 경찰서에서는 담당 경찰관이 일상적인 동태를 감시했다.
1963년 김씨는 부대에 있던 사람의 소개로 황해도 피란민 출신 이씨와 결혼을 했다. 아는 사람이 내어준 셋방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부대를 나와서는 근처의 도루코 면도날 공장에서 일을 좀 했어요. 배운 게 없으니깐 맨 막일만 했지. 또 롯데껌 공장 다니다가 나와서는 북한산에 나무 심는 데로 왔어. 조경 일. 목도(밧줄에 통나무를 꿰어 어깨에 메고 나르는 일)를 했는데 어깨가 퉁퉁 붓고 아팠지요.”
1956년 북한 황해도 고향에서 남한 북파공작원에게 납치된 지 67년 만에 국가의 배상을 받게 된 김주삼(86)씨가 2023년 2월20일 경기도 고양시 자택에서 부인 이승자씨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벽에는 부부의 젊은 시절 사진과 딸(59)이 그린 고흐의 해바라기 정물화가 나란히 걸려 있다.
부부는 그렇게 서울 북서쪽 바깥인 경기도 고양에 새 삶터를 잡았다. 부인 이씨는 이때부터 수십 년을 비닐하우스에서 살았다고 했다. “하우스 안에 장미다, 콩나물이다, 뭐다 심어놓고 팔고. 맨날 비닐하우스에서 살았지. 아들 장가보낼 때도 하우스에서 (결혼식을) 했어. (고양시) 덕이동, 관산동, 벽제…, 이런 데가 지금은 개발됐지만 그땐 다 농사짓는 데거든. 남의 땅에서 살다 보니, 이사도 스무 번 넘게 다녔어요. 나도 아이들(1녀1남) 낳고서도 비누 장사, 월부 장사, 콩나물 재배까지 안 해본 일이 없어요. 누구한테 돈을 꿀 수도 없고, 그냥 둘이서 평생 죽도록 고생했지. 지금 여기 영구임대 아파트 온 지는 꼭 20년 됐어요.”
이씨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자녀들을 제대로 못 가르친 게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딸은 그림을 아주 잘 그렸는데 뒷받침은 언감생심이었다고 했다. 거실 벽에는 딸이 그린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정물화가 두 부부의 젊을 적 사진과 나란히 걸려 있었다. 이씨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잠깐 복지관에 다녀오겠다며 일어섰다. “날마다 빵을 주는 시간이 있거든. 그거 타와야 해요. 고맙지요, 뭐.” 이들 부부는 기초생활수급자다.
김씨는 법원 판결 소식에 “많이 늦었지만 잘된 일”이라고 했다. “사채(빚)가 좀 있는데, 배상금이 나오면 우선 사채를 갚고. 애들도 사채가 조금 있어서 도와주고. 내가 신세 진 사람이 있어. 점심도 한 번씩 얻어먹고, 담배도 한 보루씩 사다 주고 했던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한테도 신세 좀 갚아야지. 그러면서 살아야지 뭐, 허허허” 부인 이씨는 “여태까지 고생바가지로 하고 살다가 그나마 지금 늦게라도 (손해배상 판결이) 됐으니까 기분은 좋았는데, 이 양반이 이북에 두고 나온 동생들도 보고 싶고 그런 게 안타깝지요. 이런 일이 생기면 잠을 못 주무시고 그래요.”
부부는 해마다 설과 추석 명절 때면 경기 파주 임진각에 간다. 실향민 가족 합동 차례에 가서라도 헛헛한 마음을 달랜다. 2019년 늦봄에는 납치된 뒤 처음으로 부인, 딸(59), 손자들과 함께 백령도 여행을 갔다. 가슴이 아파서 가기 싫어하던 곳이었다. “우리 애들이 나 죽기 전에 구경 가자고 해서. 백령도 가서 보니까, 우리 집이 있는데 다 알겠어. 아주 가까워요.”
김주삼(86)씨 부부는 해마다 설과 추석 명절 때면 경기 파주 임진각에서 열리는 실향민 가족 합동 차례에서 헛헛한 마음을 달랜다고 했다.
앞서 2022년 8월, 진실화해위는 김씨가 신청한 진실규명 사건에 대해 “국가의 납치 및 노역 행위 등 위법 또는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인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 헌법에 보장된 신체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출국 및 귀환권을 침해한 사건”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국가의 사과, 김씨의 피해와 명예 회복, 북한 가족과의 상봉 기회 제공도 권고했다. 이번 법원 판결은 진실화해위의 결정을 법적으로 확인하고 뒷받침한 것이다.
2023년 2월24일 진실화해위는 입장문을 내어 “이번 판결은 국가에 의해 규명되지 않았던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처음 밝혀냄으로써 과거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권리 구제를 받는 데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과거사 정리와 진실 규명의 중요성이 확인됐다”고 강조했다. 진실화해위는 또 “피해자가 고령임을 감안해, 명예 회복과 가족상봉 기회 등 남은 권고 조치도 조속히 이행되기를” 촉구했다.
김씨 아들(56)은 “아버지가 국가가 법원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거나 손해배상금을 다시 빼앗아가진 않을까 걱정하신다”고 귀띔했다. 1심 판결이 나온 지 일주일,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과 권고가 나온 지는 6개월이 지나도록 국가는 김씨에게 사과는커녕 어떤 연락도 하지 않고 있다. 인터뷰를 마친 김씨는 주섬주섬 외투를 챙겨 입고 절뚝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복지관에 간다”고 했지만 저만치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날도 김씨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뒤척였을 것이다.
글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사진 김진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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