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계열사를 동원해 총수일가 회사가 파는 김치·와인을 강매시킨 과정에 개입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원심은 이 전 회장이 계열사 간 거래에 개입했다고 볼 수 없다는 취지로 판단했지만, 대법원은 이 전 회장이 다양한 방식으로 관여했다며 판결을 뒤집었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이 전 회장과 태광그룹 계열사 19곳이 공정거래위원회의 21억8천만원 과징금 부과와 시정명령을 취소해달라며 낸 소송에서 16일 이 회장에 대한 시정명령을 취소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 전 회장과 태광 계열사들은 2019년 6월 태광그룹의 총수일가 사익편취 행위를 적발한 공정위로부터 과징금과 시정명령을 받자 소송을 냈다. 공정위 조사에 따르면, 이 전 회장 일가 소유 회사인 티시스는 계열사들에 김치를 10㎏당 19만원이라는 높은 가격에 2014년 상반기~2016년 상반기 동안 95억5천만원어치 구매하도록 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총수일가 소유회사인 메르뱅도 비슷한 기간 46억원어치의 와인을 계열사들에 강매한 것으로 조사됐다. 공정위는 계열사 강매로 인해 총수일가가 챙긴 이익이 최소 33억원에 달한다며 계열사에 과징금을 부과하고 이를 지시·관여한 이 전 회장에게 시정명령을 했다.
원심은 태광 계열사에 대해선 공정위 처분이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태광 계열사들은 강매가 아니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총수일가가 지분 100%를 보유한 회사를 지원하기 위해 계열사들이 전부 참여한 점 등에 비춰볼 때 (과징금 산정 기준인) ‘매우 중대한 위반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이 전 회장에 대해선 “경영기획실을 통해 주요사항을 결정·지시한 것으로 보이나 그런 사정만으로 회사들 사이의 거래에 모두 관여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시정명령을 취소해야 한다고 봤다.
대법원은 계열사뿐 아니라 이 전 회장에 대한 공정위 처분은 정당하다며 원심판결 일부를 파기환송했다. 대법원은 “특수관계인이 부당한 이익제공행위에 ‘관여’했는지를 판단할 때 행위주체와 행위객체 및 특수관계인의 관계, 실행자가 특수관계인의 동의 없이 행위를 하는 게 가능한지, 해당 행위를 할 동기가 있는지 등 제반 사정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 특수관계인이 기업집단에 다양한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이 전 회장은 그룹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김치·와인 거래에 관여할 수 있었고 △경영기획실이 이 전 회장 모르게 김치·와인거래를 할 동기가 없다는 점 등을 토대로 이 전 회장이 거래 과정에 개입했다고 판단했다.
정은영 대법원 공보연구관은 “공정거래법 제23조의2 제4항 특수관계인의 ‘관여’의 의미 및 증명에 관한 법리를 최초로 선언하고, 이익제공행위에 관한 특수관계인의 평소 태도 등 간접사실에 의한 증명을 폭넓게 허용한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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