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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코인 투자’ 매일 생긴 5만원에 속아서, 기초수급자 됐습니다

등록 2023-04-18 07:00수정 2023-04-18 20:36

5년간 국내코인 범죄 피해액 5조3000억원
게티이미지코리아
게티이미지코리아

지난달 29일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40대가 납치돼 숨진 ‘강남 납치·살인 사건’은 가상자산(암호화폐) 투자를 둘러싸고 이해관계를 달리한 이들이 계획해 저지른 청부살인으로 드러나고 있다. 수년간 규제 없이 내달려온 ‘코인판’의 탐욕이 사적 보복범죄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치권 등에서 뒤늦게 가상자산 규제 입법 움직임이 나오는 가운데, 코인판의 적나라한 현실을 통해 필요한 대안을 짚어봤다.

경기도의 한 오피스텔 시설 관리인으로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윤수한(가명∙51)씨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건 3년여 전 처음 시작한 가상자산(암호화폐) 투자였다. 당시 코인 업계에서 투자 홍보 업무를 하던 ㄱ씨를 일하다 우연히 만난 윤씨는 “돈 벌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는 ㄱ씨의 권유로 이른바 ‘잡코인(거래규모가 작은 코인)’으로 불리는 가상자산 투자를 시작했다.

‘설마 세상에 돈 벌기 쉬운 방법이 있을까’ 의심하던 윤씨를 ㄱ씨는 자신이 살고 있다는 고급 펜트하우스로 초대했다. 값비싼 음식을 대접하는 등 호화로운 생활도 과시했다. 투자 관련 미팅을 할 때마다 ㄱ씨는 티브이(TV) 드라마에 나오는 중년 탤런트를 데리고 나와 “우리 다 코인으로 한 달에 수백만원씩 벌고 있다”며 윤씨를 설득했다.

반신반의하며 그동안 모아놨던 현금 300만원을 가상자산에 투자했고, ㄱ씨 말대로 매일 꼬박 5∼6만원 정도 수익이 생겼다. 2∼3개 다른 코인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모두 국내·국외 가상자산 거래소에 단독상장했거나, 비상장된 코인들이었다. 이후 윤씨는 함께 코인에 투자한 사람들과 해외에서 열리는 코인발행 업자들의 프로젝트 설명회도 다니기 시작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아 윤씨가 투자한 코인들은 모두 상장 폐지됐다. 그동안 윤씨가 투자했던 2000만원은 휴짓조각이 되고 말았다. 결국 윤씨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존 채무에 더해 코인 투자로 생긴 빚더미를 못 이겨 1년 전 파산 신청을 했다. 현재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인 윤씨는 어머니와 함께 임대주택에 살고 있다.

“돈 날린 게 내 탓이야? 너희들이 투자했잖아.” 빚더미에 앉은 윤씨가 망연자실한 채로 처음 자신에게 코인 투자를 권유했던 ㄱ씨를 찾아가자 ㄱ씨는 이렇게 말했다. 윤씨는 코인 투자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으로 지난달 말 강남 한복판에서 벌어진 납치·살해 사건을 보면서 “남의 일 같지 않다”고 했다.

이번 강남 납치·살해 사건의 발단이 된 ‘퓨리에버 코인’은 시세조종이 용이한 ‘김치 코인’으로 윤씨가 투자한 코인과 비슷했다. ‘리딩방·투자회사’를 가장한 코인 다단계업자들이 문어발식으로 사람들을 모아 투자금을 모집했고, 코인 발행업자·상장 브로커·마켓메이킹(MM) 업자 등이 ‘뒷돈’으로 거래소에 코인을 상장해 피해 규모가 커졌다.

‘퓨리에버 코인’과 유사한 다단계 영업 방식의 코인판을 경험한 윤씨는 “하루 200만원씩 통장에 꽂히고, ‘돈 넣으면 돈을 또 주겠다. 사람 더 끌어오기만 해라’는 식으로 돌아갔다. 이 업계에 발 들이면 못 빠져나간다”며 “나에게 투자 권유한 사람들을 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망했다. 사기 등으로 고소하려고 변호사 사무실을 백방으로 찾아다녔지만, ‘관련 법이 없다’는 소리만 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불법 다단계 업체는 처벌하면서, 같은 수법을 코인에 적용하면 처벌받지 않는 현 제도가 피해를 키웠다고 윤씨는 덧붙였다.

3년여 전 코인업계 투자 홍보 업무를 하던 지인 권유로 ‘마인덱스 코인’ 등 국외 거래소에 단독상장한 코인에 투자했다가 4000만원을 손해본 ㄴ씨 또한 “이 코인판에선 돈 날려도 방법이 없다. 사기인 걸 알지만, 내 손으로 ‘투자’한 걸 ‘사기’로 증명하는 게 쉽지 않다. 이번 강남 사건처럼 협박·공갈·살인 사건이 생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윤씨는 “서울 4년제 대학 나와서 기술 가지고 평범하게 살아왔던 내가 코인 투자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전락했다”며 “여전히 위험한 코인에 투자하고 있는 청년들을 말리고 싶다. 코인을 규제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피해가 집중되는 특정 거래소에만 단독 상장된 가상자산이 389개(지난해 연말 기준)에 달했다. 국내에서 거래되는 가상자산 1362개의 28.5%에 달한다. 단독 상장된 가상자산 중 절반 이상(57%)은 특히 피해가 큰 국내 가상자산인 ‘김치 코인’이다. 최근 5년간 국내 코인 관련 범죄 피해액은 5조3000억원에 이른다.

‘시어터진’ 김치코인…시장진입 문턱은 허술, 시세조종 처벌은 미약

지난해 한국 사회를 뒤흔든 루나·테라 폭락 사태부터 이번 ‘퓨리에버 코인’ 투자에서 비롯한 강남 납치·살해 사건까지. 정부가 뚜렷한 대책 없이 손 놓고 있는 사이 법 테두리 바깥에 놓인 가상자산(암호화폐) 시장은 시세조종·다단계 사기 등 각종 불법이 들끓었다. 전문가들은 “터질 게 터진 것”이라며 시장 전반에 대한 제도 개선과 시장 내 불법 행위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 2017년 9월 금융위원회는 “가상자산을 악용한 불법거래, 가상자산 투자를 빙자한 유사수신‧다단계 등 사기범죄 발생으로 소비자 피해가 우려된다”며 ‘가상통화 관계기관 합동 태스크포스(TF)’를 만들었다. 하지만 6년이 지났지만 정부가 내놓은 가상자산 관련 시장 규제책은 뚜렷한 게 없다. 지난 2021년 가상자산 거래소 등 가상자산 사업자에게 자금세탁 방지 의무를 부과하는 ‘가상자산 돈세탁방지법(특정금융정보법 개정안)’이 시행됐지만, 특금법은 목적 자체가 자금세탁 방지를 위해서 만들어진 법으로, 실명을 알 수 없는 사업자에 대해서 거래소들이 책임을 져야함을 명시한 법이다. 시세조정이나 다단계 등 가상자산 시장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언급은 없어 불법행위를 규제할 수 있는 내용은 담고 있지 않다.

홍기훈 홍익대 경영학부 교수는 “현재 가상자산 시장에는 사업성이 없는 프로젝트를 코인화해 판매한 사람이 있고, 그런 코인을 시세조종한 사람이 있는데, 이들을 처벌하려면 사기나 배임·횡령, 유사수신 등의 혐의를 적용해야 하지만 법적으로 의도적인 ‘불완전 판매’를 입증하는 게 쉽지 않다”며 “그럼에도 사법기관이 의지를 가지고 강한 처벌을 내려 시장에 ‘불법 행위를 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는 신호를 줘야 한다”고 했다.

이른바 ‘김치 코인(국내 또는 내국인 주축 발행)’ 등 내재 가치가 불확실한 가상자산의 시장 유입 자체를 막을 제도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11일 서울남부지검 금융조사1부(부장 이승형) 가상자산 비리 수사팀은 지난 1월부터 진행한 ‘코인거래소 상장 비리 및 코인 시장조작’ 중간 수사결과 발표에서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들의 내부 상장심사 절차가 관련 법령과 제도의 부재로 껍데기만 남은 상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거래소 심사를 통해 건전하고 사업성 있는 가상자산이 상장되는 게 중요하지만, 검찰 수사결과 코인원 등 일부 거래소들은 문지기 역할은커녕 시세조종을 조장했고, 코인 상장을 위한 코인발행사 감사도 특정 업체를 통해 형식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구태언 변호사(법무법인 린)는 “시세조종이나 다단계 사기 등 불공정거래에 대한 처벌 이전에 발행·공시 규제를 먼저 도입해 부실한 가상자산이 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현재 국회 계류 중인 가상자산 관련 법안은 모두 13개(가상자산업법 제정안 7건·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 4건·특정금융정보법 개정안 2건)다. 가상자산거래업 인가제·불공정거래행위 금지·시세조정행위 금지·가상자산 공시의무·내부통제기준 마련 의무 등 가상자산 사업자 진입규제와 부정거래 금지, 투자자 보호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박지영 기자 jy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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