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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고아라는 것도, 양어머니 존재도 모두 거짓이었다”

등록 2023-05-15 09:20수정 2023-05-18 08:12

조작된 입양③

<한겨레>는 창간 35돌 기획으로 국제입양인 20명의 이야기를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지난 5월11일은 입양의 날이었고 올해는 국제입양 70주년이다. 칠레·아일랜드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국가 차원의 인권침해 조사를 곧 시작하기도 한다.

산 역사의 주인공들을 섭외해준 ‘덴마크 한국인 진상규명 그룹’(DKRG)은 덴마크를 비롯한 스웨덴, 노르웨이, 독일, 네덜란드, 미국 등 10개국에서 650여명이 가입한 세계 최대의 한인 입양인 커뮤니티다. 지난해 8월부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334건의 입양 사례를 제출하며 조사를 신청해 12월 ‘해외입양과정 인권침해 사건’ 조사 개시를 이끌어낸 바 있다. 진실화해위는 오는 6월부터 코펜하겐·오슬로 등 현지 조사에 나설 계획이다. 세계 20만명으로 추산되는 국제입양인들의 이목이 여기에 쏠려 있다.

<한겨레>는 영아 매매, 기록 위조 등 출생과 함께 부당하게 취급된 자신들의 역사를 뒤져 진실과 정의를 회복하려는 국제입양인들의 열망을 존중한다. 20명이 짧게 쏟아낸 과거사 속엔 조사 대상자로서 진실화해위에 거는 기대가 함께 담겨 있다.

서류에 6개월 머문 고아원 실제 나는 그곳에 없었다

베티나(입양 당시 6개월, 현재 49살, 덴마크)

입양 서류상 저는 1974년 2월7일에 태어났고, 한국 이름은 조정희입니다. 젊은 미혼 여성이 저를 낳고 생년월일이 적힌 종이 한장을 ‘바다의 별’ 가톨릭 어린이집 앞에 두고 떠났습니다. 그해 8월15일 누군가 저를 비행기에 태웠습니다. 이틀 뒤 생후 6개월 아기로 덴마크에 와 입양됐다고 합니다.

2019년 양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한국에서 친가족 찾기를 시작했습니다. 마포경찰서에 갔습니다. 디엔에이(DNA) 검사를 받았습니다. 생모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커뮤니티센터를 찾아갔어요. (제 사건 파일에 기록된) 생후 6개월 동안 머문 고아원에서는 제가 그곳에 머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났고, 첫 3개월간 생모와 지냈으며, 생모가 1974년 5월9일 저를 한국사회봉사회로 데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완전한 입양 파일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받은 문서엔 수정 사항이 있었고, 친부모와 저에 대한 새 정보가 없었습니다.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2022년 11월 다시 한국에 와 수정을 거치지 않은 파일 사본을 받았고, 번역자의 도움을 받아 손글씨로 된 한글과 한자를 해독했습니다. 그 결과 친부모가 없는 상황에서 법적 후견인이 됐던 한국사회봉사회 대표가 제 성과 이름을 지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파일에는 당시 24살이었던 생모 이름과 생년월일, 제가 태어난 곳 주소가 적혀 있었습니다.

입양인이 입양 서류에 접근할 권리를 제대로 주었으면 합니다. 지금 친가족을 찾는 일은 정말 복잡합니다. 덴마크한국인진상규명그룹(DKRG)은 이제 막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시작했죠. 밝혀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입양때 모습 사진 두장 정말로 내가 맞는걸까

미 슐리크테르가 갖고 있는 자신의 입양 당시 사진(위 두 사진). 그는 이 사진 속 아이가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 슐리크테르가 갖고 있는 자신의 입양 당시 사진(위 두 사진). 그는 이 사진 속 아이가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 슐리크테르(입양 당시 3살, 현재 46살, 덴마크)

입양 이야기―버전 1

3살 때 덴마크에 도착해 두 자녀를 둔 가정에 입양되었습니다. 그들은 고아를 돕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 고 있었습니다. 안전하고 행복한 어 린 시절을 보냈지만, 때때로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느낌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입양 이야기―버전 2

이 이야기를 알게 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 다. 우연한 기회에 많은 분의 도움으로 제 입양 이야기의 조각을 맞춰나갔습니다. 저는 1976년 12월16일, 3살 조금 넘어 덴마크에 도착했습니다. 양부모는 3주 전 공항에 왔는데, 제가 비행기에 타지 않았다 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갔죠. 현재로서는 그때 그 아이가 비행기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사진 속 아이가 저라는데, 두 사진이 같은 아이가 아닐 수도 있음을 최근에 알아냈습니다. 제 사진이 아닐 수 있습니다. 생년월일은 여러번 바뀌었고, 덴마크 도착 직전 심각하게 아팠던 것으로 나옵니다. 정말 제가 아팠을까요, 아니면 도착하지 못한 다른 아이가 아팠을까요? 그게 사실이라면 저는 누구일까요?

진실화해위원회에 바랍니다. 사진 속 인물을 찾아주세요. 제가 갑자기 입양됐다면 제 입양 이야기 중 맞지 않는 부분은 어디일까요? 제가 길 거리에서 발견된 고아가 아닐 수도 있나요? 한국에 저를 그 리워했거나 아직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입양·출입국 기록 달라 그것조차 사실인지 의문

메리 바워스(입양 당시 5개월 추정, 현재 40살 또는 41살, 미국)

첫 기억 중 하나는 양할머니가 케이크를 장식하는 모습입니다. 케이크는 3층이었고 버터크림으로 만들어진 꽃들이 있었어요. 빛나는 별처럼 별사탕이 반짝였어요. 그 케이크 안에 들어가서 눈 덮인 언덕에서 썰매를 타고 싶었습니다.

케이크에 대한 집착이 행복한 기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상상하고 싶지만, 그다지 축하할 만한 인연은 아닙니다. 입양 기록과 출입국 서류, 한국의 양음력까지 고려하면 저는 다섯개 생년월일을 가졌습니다. 다 합치면 기대수명은 약 433년 정도. 하지만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사회는 그런 운명에 처하게 된 저에게 “운이 좋았다”고 말합니다. 참수되기 전의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생일 케이크를 먹을 수 있는 미국의 입양 가정에서 자랐으니까요. 정체성, 가족, 국가로부터 폭력적으로 단절된 공주라고 해도 동정은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바닐라 프로스팅을 먹으며 층 사이에 감정을 숨깁니다.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깊은 슬픔이 밀려옵니다. 감정은 솔직한 법입니다. 세상은 제가 상상할 수 없었던 무대에서 평범하지 않은 진실을 환영해주었습니다. 낯선 이들이 상처받은 마음에 위로를 주기도 했습니다. 그 교감의 순간들을 기억합니다. 끔찍한 아동학대, 무고한 피해자의 수치심, 반인륜적 범죄에 장미 장식을 입히고 이를 ‘케이크’라고 선언하는 일을 계속해서는 안 됩니다.

‘생계탓 포기’ 서류와 달리 친부모 ‘아기 죽었다’ 들어

미아 리 쇠렌센 (입양 당시 9개월, 현재 35살, 덴마크)

제 삶은 덴마크에 오기 9개월 전 1987년 광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엄마는 임신 25주였을 때 급하게 가까운 병원으로 실려 가 저를 낳았습니다. 아기가 심각한 손상 없이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병원에서 오랫동안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제가 어디에 얼마나 있었는지, 누가 제 인생에 대해 이런 끔찍한 결정을 내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부모가 돈이 없어 저를 키울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믿어왔습니다. 제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외국으로 보내줬다고 생각했습니다. 입양 서류에 적힌 내용입니다. 그러나 지난해 그들과 재회했을 때 입양 서류가 전부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친가족은 제가 태어날 때 죽었다고 생각했고, 저는 가족들이 가난해서 저를 버렸다고 여겼습니다. 또 덴마크 양부모는 입양을 통해 저에게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줬다고 믿었습니다. 많은 의문에 대한 답을 얻었지만, 진실을 더 알아야 합니다. 누가 나와 친가족에게 이런 짓을 했는지, 한국에 머무는 동안 나는 어디 있었는지, 누가 내 인생을 그렇게 끝내고 시작할 권리를 행사했는지, 내 생년월일은 언제인지, 어떻게 무고한 아이의 생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이런 비인간적 결정을 내릴 수 있었는지. 진실을 알면 남은 인생을 좀 더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잃은 과거 찾을수 없지만 책임자 찾아내는 일 필요

시몬 호크베르다(입양 당시 4살, 현재 57살, 네덜란드)

1966년 10월6일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이름은 김귀자, 아버지는 아프리카계 미군이었습니다. 둘은 어머니가 일하던 바에서 만났는데, 파주 인근 유엔클럽이라는 바였을 거예요. 1969년 후반 남동생이 태어났습니다. 학교에 갈 기회도 없었고,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기 힘든 형편이었습니다. 1970년 혼혈이라는 이유로 네덜란드로 입양됐습 니다.

1986년 한국사회봉사회에 편지를 보내 어머니와 동생을 찾을 수 있는지 문의했습니다. 저를 기억 하는 한 사람이 파주 옛 주소로 찾아갔지만 도시 전체가 바뀐 뒤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분은 얼마 뒤 세상을 떠났고 조사는 중단됐습니다.

미군 캠프타운에서 저 같은 혼혈 아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알게 되면서 분노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가 이뤄진 뒤 우리 입양인과 친가족이 아직도 겪어야 하 는 모든 끔찍한 일들에 대해 누군가는 사과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원하는 것은 엄마를 안고 우리가 잃어버린 세월에 대해 함께 우는 것입니다. 어머니(올해 79살이라고 합니다)와 남은 시간을 보내길 원합니다. 어머니를 찾는데 성공한다면요.

기획공동진행 한분영(덴마크한국인진상규명그룹 공동설립자), 번역감수 김지은(April)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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