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을 연장한 임금피크제라도 임금을 지나치게 많이 깎고 이로 인해 생긴 불이익에 대한 조치가 없다면 무효라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지난해 대법원은 정년을 유지한 채 합리적인 이유 없이 임금을 줄이는 임금피크제는 무효라고 판결했다. 이번 판결은 정년을 연장했다 해도 임금 삭감 등의 피해가 크다면 임금피크제를 무효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는 데 의의가 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41민사부(재판장 정희일)는 11일 케이비(KB) 신용정보 전·현직 직원 4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피크제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원고들이 청구한 금액 가운데 5억3794만여원을 인용했다. 원고들은 각각 임금피크제가 적용되지 않았다면 받을 수 있던 퇴직금과 임금을 감안해 5623만여원에서 최대 1억8764만여원을 받게 됐다. 케이비(KB) 신용정보는 2016년 2월 노조와 단체협약을 맺고 정년을 만58살에서 만60살로 늘리는 대신 만 55살 이상부터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문제는 임금삭감 폭이었다. 업무 성과에 따라 기존 연봉의 45~70%를 받도록 설계됐는데, 저성과자라면 기존 연봉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재판부는 “근무 기간이 2년 늘어났음에도 만55살 이후 받을 수 있는 총액은 (임금피크제 적용 전에 견줘) 오히려 삭감될 가능성이 크고 손해의 정도가 적지 않다”며 “임금이 일시에 대폭 하락하는 불이익을 입게 된다. 그럼에도 피고가 선임직원들의 업무량이나 업무강도를 줄이는 등 불이익에 대한 조치를 적절하게 마련했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2022년 5월 임금피크제가 정년 연장 등 합리적 보상 없이 도입됐다면 연령에 따른 차별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냈다. 이밖에도 △임금삭감으로 인한 불이익 정도 △임금삭감에 대한 대상 조치 도입 여부 △임금피크제 도입 목적의 타당성 등 합리적 이유가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봤다. 이번 판결에서도 대법원이 제시한 기준이 인용됐다.
임금피크제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대법원 판례를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케이티(KT) 전·현직 직원들이 회사의 임금피크제가 무효라며 낸 소송은 1, 2심 모두 직원들이 패소했다. 당시 재판부는 대법원이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를 무효로 판결했다는 점에 주목해 ‘정년연장형’인 케이티의 임금피크제는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케이티(KT)의 임금피크제는 절반 이상 연봉을 깎을 수 있는 케이비(KB)의 사례와는 다르기도 했다. 노사합의로 매년 임금을 10%포인트 줄이는 식으로 임금피크제가 설계됐다. 정년은 만58살에서 만60살로 늘렸고 임금피크제는 만56살부터 시작됐다. 정년 직전인 만 59살에는 임금을 60%를 받을 수 있는 구조였다.
이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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