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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현장에서] 김광동·이옥남과 ‘민족의 정통성’

등록 2023-05-28 11:18수정 2023-05-28 21:01

‘민족’ 명분으로 하미 학살 조사 반대
김광동 “한국전쟁 부역자 가리겠다”
2기 진화위 색깔·방향성 우려스러워
지난 25일 오전 서울 중구 퇴계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6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진실화해위 2주년 맞이 기자간담회에서 김광동 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지난 25일 오전 서울 중구 퇴계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6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진실화해위 2주년 맞이 기자간담회에서 김광동 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2만92건 중 딱 1건이다. 지난 24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55차 전체위원회에서 3대 4 표결로 각하된 베트남 하미 학살 조사 건에 관한 이야기다. 2기 진실화해위가 출범한 뒤 2년 동안 피해자들이 신청한 2만 건이 넘는 진실규명 사건 중 베트남전 관련 건은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가장 논쟁적이었다. 2기 진실화해위 출범 뒤 전체위원회에서 표결까지 간 경우는 처음이었다. 더불어 어떤 강력한 징후이자 신호였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대통령이 지명한 김광동 위원장 체제가 본격적으로 어떤 길로 갈지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24일 전체위원회에서 하미 학살 사건 조사를 반대한 논리 중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민족’이었다. 진실화해위 기본법의 1조 목적엔 ‘민족의 정통성 확립’이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국민의힘 추천 상임위원인 이옥남 1소위 위원장은 “여기서 민족의 개념은 국적이 아니라 혈통과 언어, 역사를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외국인이라도 같은 피를 지닌 동포들의 사건은 소화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외국 국적자의 피해 사건을 다룰 여력이 없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자못 충격이었다. 21세기에 민족을 이야기하며 피해자를 차별하겠다고 내놓고 말하는 건 좀….

외국땅에서 벌어진 하미 사건이 진실화해위 조사 범위에 해당하는지를 놓고, 법률가가 포함된 국민의힘 추천 위원들은 진실화해위 기본법에 대한 갖가지 법해석을 내놓으며 반대했지만 공허했다. 한국어를 쓰는 사람이라면 피해자가 외국인이어서 안된다는 조항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2조1항4호는 “1945년 8월 15일부터 권위주의 통치시까지 헌정질서 파괴행위 등 위법 또는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발생한 사망·상해·실종사건, 그 밖에 중대한 인권침해사건과 조작의혹사건”이라고 진상규명의 범위를 규정한다. 그 어디에도 외국인 피해자 배제를 명시한 부분은 없다.

그밖에도 전체위원회에선 온통 떠넘기기 발언 일색이었다. 한 위원은 행정부나 국회가 할 일이라며 떠넘겼다. 그동안 행정부는 무슨 일을 했을까? 2019년 4월 베트남 피해자들이 청와대를 직접 찾아와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해 9월 국방부는 “진상조사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국회는? 할 일을 했다. 진실화해위 기본법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2기 진실화해위다. 하지만 김광동 위원장은 사법부가 대신할 일이라고 떠넘겼다. 사법부는 판결 내리는 곳이지, 조사하는 곳이 아니다. 김광동 위원장과 국민의힘 추천 위원들이 이 사건을 끝없는 떠넘기기로 반대한 이유는 추측된다. 그냥 하기 싫어서다. 베트남전이 보수층의 마지막 터부임을 고려하면 이해가 간다.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네트워크 관계자들이 지난해 4월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원회 앞에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 진실규명 신청 기자회견’을 열어 “하미학살은 1968년 베트남 꽝남성 하미마을에서 벌어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로 135명의 주민이 희생된 사건”이라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네트워크 관계자들이 지난해 4월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원회 앞에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 진실규명 신청 기자회견’을 열어 “하미학살은 1968년 베트남 꽝남성 하미마을에서 벌어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로 135명의 주민이 희생된 사건”이라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베트남전 하미 사건 개시 건을 각하한 바로 다음날인 25일, 김광동 위원장과 이옥남 1소위 위원장은 진실화해위 2주년 맞이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전쟁 부역혐의 희생자의 부역 여부를 살피겠다”는 말을 했다. 부역자든 아니든 사람을 재판 없이 산에 끌고가 총살해 묻는 건 전시라도 범죄다. 2009년 1기 진실화해위 진실규명 보고서에 담긴 내용이다. 대법원도 같은 판례를 남겼다. 베트남전 사건 각하를 통해 드러난 인식이 이제 하나둘 한국전쟁과 인권침해·조작 사건 등에 반영되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부역자 발언은 신호탄 같다.

다시 민족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1964~1973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이 하미를 포함한 130곳에서 1만여명에 이르는 민간인 희생자를 낸 일은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1999년 이후 진행돼온 베트남전 피해자들에 대한 민간 차원의 조사와 사과는 한국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해왔다고 평가된다. 얼마전 덴마크를 비롯한 국제입양인 20명의 편지를 받아 실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입양인들은 진실화해위 조사 개시에 어마어마한 기대를 했다. 더 나아가 이번 조사를 계기로 모국에 대한 입양인들의 프라이드가 새록새록 돋아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실과 화해가 국가의 격을 높인다는 점에서, 핏줄이나 민족의 정통성 따위는 이런 경우에 더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싶다.

2기 진실화해위는 2년간 35%의 사건을 처리했다고 한다. 1년 뒤엔 사건 처리율이 57%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만큼 조사 개시와 진실규명 여부를 결정하는 속도가 높아질 것이다. 김광동 위원장이 앞으로 자신의 색깔을 어떻게 드러낼 지, 최근의 발언과 행보를 참고 삼아 주시할 필요가 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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