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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베트남전 학살, 팩트는 단순하다…‘김순덕의 도발’에 관하여

등록 2023-06-05 09:00수정 2023-06-05 10:41

1968년 하미 학살과 2001년 하미 위령비 비문 연꽃 봉합 사건의 팩트
2001년 봄에 촬영한, 연꽃으로 덮이기 전의 하미 마을 위령비 비문. 이용준 전 주베트남 한국대사관 참사관은 2001년 1월부터 베트남 공산당 고위 관리들에게 이 비문이 베트남의 외교정책에 부합하지 않다는 말을 하기 시작하고 이후 결국 비문은 연꽃 그림으로 덮인다. 고경태 기자
2001년 봄에 촬영한, 연꽃으로 덮이기 전의 하미 마을 위령비 비문. 이용준 전 주베트남 한국대사관 참사관은 2001년 1월부터 베트남 공산당 고위 관리들에게 이 비문이 베트남의 외교정책에 부합하지 않다는 말을 하기 시작하고 이후 결국 비문은 연꽃 그림으로 덮인다. 고경태 기자

지난 5월30일 <동아일보> 디지털콘텐츠로 실린 ‘김순덕의 도발-과거사에 대한 예의, 베트남과 비교하면’을 읽었다. 김순덕 대기자는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즈엉사 하미 마을 위령비의 비문을 덮은 연꽃 그림은 한국 정부의 압력이 아니었다는 설명과 함께 이곳 하미를 포함해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전쟁 중 학살을 했다는 팩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역사의 다면적 진실을 강조하면서, 이 문제의 진실규명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단체를 경직된 좌파의 문제의식과 행동이라고 비판한다. 베트남전에 관한 글을 긴 시간 써온 기자로서, 김순덕 대기자의 뒤늦은 관심을 환영한다. 다만 글 속에 나온 여러 사실관계와 해석에 동의할 수 없다. 23년 전 위령비 기공식 현장부터 오랫동안 하미 마을을 지켜봐왔기에 최소한의 책임감으로 생각을 밝혀본다.

베트남 중부지역에 한국이 학교를 세운 이유

먼저 한국정부가 하미 마을 위령비 비문을 덮는데 압력을 넣지 않았다는 부분.

김순덕 대기자는 이렇게 썼다. “위령비 속 끔찍한 추모문을 한국 정부가 덮으라고 압력을 가했던 것이 아니고, 우리 군인들의 종용에 주민들이 위령시를 덮은 것도 아님은 알려야겠다 싶은 거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 정부는 2001년 그런 위령비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베트남 공산당 국제부에 위령비의 존재를 알렸을 뿐이다. 나머지는 베트남에서 정리했다.”

이 대목은 최근 시민단체 회원들이 2001년 한국 정부의 압력으로 덮여진 베트남 하미 마을 위령비의 비문을 살려내자는 운동을 벌이자 여기에 대한 반박으로 쓴 것이다.

위 인용문의 근거가 된 것은 이용준 전 주베트남 한국대사관 참사관(현 세종연구소 이사장)의 책 <베트남, 잊혀진 전쟁의 상흔>(2019년 개정판, 2003년 초판 제목은 ’베트남, 잊혀진 전쟁의 상흔을 찾아서’)이다. 당시 베트남 중부 지방에 학교 40개를 짓기 위해 부지를 물색하러 답사를 다닌 이야기를 중심으로 베트남 외교관 재직 시절을 담은 책이다. 베트남에 학교 40개를 지어주게 된 것은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가 1999년 9월 <한겨레21>을 시작으로 주요 외신에까지 보도되고 국제 이슈가 되면서 한국 정부가 과거사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압력’이 아니라 ‘전달’만 했다?

한국정부는 2001년 200만달러의 공적개발원조자금(ODA)를 풀어 중부 5개성에 학교를 짓기로 한다. 중부 5개성은 꽝남, 꽝응아이, 빈딘, 푸옌, 칸호아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 청룡·맹호·백마 부대가 주둔하면서 작전을 한 곳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외교관으로서 큰 업적을 세운 것처럼 자신의 여러 행위들을 기술하고 있는데, 전혀 다른 관점에서 비판할 여지가 많아 보인다. 기자라면 이런 책을 읽을 때 비판적 촉수를 세워 전체 맥락을 파악해야 할텐데, 김순덕 대기자는 지은이에게 감정이입만 한 듯 하다. ‘압력’을 행사하지 않고 ’전달’만 했다고 말한다.

김순덕 대기자는 자신의 칼럼에서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즈엉사 하미 마을 위령비의 비문을 덮은 연꽃 그림은 한국 정부의 압력이 아니었다는 설명과 함께 이곳 하미를 포함해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전쟁 중 학살을 했다는 팩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말한다. 인터넷 화면 갈무리
김순덕 대기자는 자신의 칼럼에서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즈엉사 하미 마을 위령비의 비문을 덮은 연꽃 그림은 한국 정부의 압력이 아니었다는 설명과 함께 이곳 하미를 포함해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전쟁 중 학살을 했다는 팩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말한다. 인터넷 화면 갈무리

<베트남, 잊혀진 전쟁의 상흔>에는 이용준 참사관이 2001년 신년인사를 겸해 베트남 공산당 관계자들을 만나 하미 위령비 이야기를 꺼내는 장면이 나온다. 하노이의 공산당 대외위원회 간부들이 위령비 문구에 대한 한국 대사관의 견해를 묻자 이 전 참사관은 “그 문구의 취지가 과거사 문제에 관한 베트남 공산당과 정부의 정책에 부합되지 않는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그런 원한 맺힌 문구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문장도 책에 있다.

“문구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한국의 외교관이 베트남 지역에 있는 베트남 역사 기록물과 전쟁 희생자 위령비에 관해 가타부타 발언을 했을까. 왜 굳이 “반드시 수정돼야 한다”고 확신했을까. 첫째, 그 위령비를 월남참전전우복지회라는 한국 참전군인 단체 돈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둘째, 당시 한국 정부는 그 지역을 비롯한 베트남 중부에 학교를 막 세워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갑 위치에서 발언에 자신감과 무게감이 실리기 충분했다.

어쩌면 이용준 전 참사관은 공손하고 예의바른 태도로 말했을지 모른다. 베트남 고위 관리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압력’이란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요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권력이나 세력에 의하여 타인을 자기 의지로 따르게 하는 힘’이 압력이다. 하미 위령비 비문이 덮이기까지엔 어떤 힘이 작용했다. 한국을 대표해 베트남 관리들을 만난 ‘영향력 있는 참사관’의 힘이 단초가 됐다는 정황이 책에 버젓이 나온다.

책에는 또 하미가 아닌 다른 마을의 학교 건립 후보지에서 발견된 한국군 학살 희생자 위령비를 철거해달라고 요구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위령비를 숨기면 역사를 숨길 수 있고, 이것이 베트남 아이들의 역사관 형성에 도움이 되며 대한민국 국익에도 부합한다고 보는 외교관의 시각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김순덕 대기자는 이 책을 보고서도 이 전 참사관이 행사한 듯한 ‘압력’의 기운을 감지하지 않는다.

2022년 5월에 촬영한 하미 마을 위령비. 비문 내용을 연꽃으로 덮은지 벌써 20년 넘게 지났다. 비문 사건은 주민들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었다. 고경태 기자
2022년 5월에 촬영한 하미 마을 위령비. 비문 내용을 연꽃으로 덮은지 벌써 20년 넘게 지났다. 비문 사건은 주민들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었다. 고경태 기자

게릴라가 섞였으니 죽일 만 했다?

두번째, 하미 사람들은 죽일 만했다는 뉘앙스.

김순덕 대기자는 “팩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면서 한 논문을 인용해 이야기를 이어간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5대대 전술책임지역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활동하는 ‘게릴라 사회’였다. 연세대 역사와공간연구소 한성훈의 2018년 논문 ‘하미마을의 학살과 베트남의 역사 인식’에 따르면, 피해 유족을 대표했던 응우옌 반 꺼이(응우옌꼬이-필자 주) 역시 15살 때부터 낮에는 농부로, 밤에는 전사로 활약한 유격대원이었다. 베트남 정부가 하미마을 희생자 135명 중 60명을 열사로 인정했을 정도다.”

위 대목은 팩트라기보다는 오래된 상황논리다. “베트남전은 본래 게릴라전이었고 학살된 주민 또는 생존자 중에 실제 게릴라가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럴 만한 개연성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달라지는지 묻고 싶다.

김순덕 대기자가 글에서 논문을 인용해 ‘낮에는 농부로, 밤에는 전사로 활약한 유격대원’으로 활동했다는 유족 대표 응우옌 반 꺼이(응우옌꼬이)가 위 오른쪽 사진 속 인물이다. 그렇다 한들 달라지는 팩트는 없다. 사진은 베트남 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네트워크 활동가들이 지난 5월17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하미 학살 사건 조사 개시를 촉구하는 모습.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김순덕 대기자가 글에서 논문을 인용해 ‘낮에는 농부로, 밤에는 전사로 활약한 유격대원’으로 활동했다는 유족 대표 응우옌 반 꺼이(응우옌꼬이)가 위 오른쪽 사진 속 인물이다. 그렇다 한들 달라지는 팩트는 없다. 사진은 베트남 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네트워크 활동가들이 지난 5월17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하미 학살 사건 조사 개시를 촉구하는 모습.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베트남전 시기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치하의 농경부락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남베트남 군경의 가족도 있었고, 베트콩(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가족도 있었다. 마을마다 두 세력간의 역학관계가 작동했다. 한 가족 안에 베트콩으로 간 자식과 남베트남 군인으로 간 자식이 동시에 나오기도 했다. 1968년 2월24일 하미 학살 현장에서 두 발목이 잘린 채 살아남은 팜티호아(1928~2013)의 남편은 베트콩과 싸우다 죽은 남베트남군 출신이다. 그렇다고 더 억울한 피해일까. 하미 마을 희생자 135명 중에 당연히 남베트남 혁명세력과 북베트남 정부에 동조하는 사람이나 실제 활동에 참여한 사람이 있었을 텐데, 이들에겐 덜 억울한 죽음일까. 베트콩이라면 함부로 죽여도 되었을까.

김순덕 대기자는 희생자 135명 중 60명이 열사라는 논문 내용도 인용했다. 설령 열사면 무엇이 달라지나. 열사는 우리식으로 치면 보훈대상자다. 각 지역 인민위원회에 따라 한국군 학살 희생자에 대한 예우가 조금씩 다르다. 사실은 거의 아무런 보상이 없다. 확인을 해보니 하미에서는 135명 중 18세 이상의 요건을 충족하는 60명을 열사로 인정했다고 하는데, 해당 인민위원회가 이들의 보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배려한 결과다.

양민을 죽인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인 사건

김순덕 대기자는 베트남 피해자들을 돕는 이들을 좌파로 단정하고 베트콩의 만행은 기록되지 않는다거나, 북한 인권에 무심하다는 비판을 한다. 탈북자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왜 당신은 베트남전에 관심없냐고 따지면 무슨 답이 돌아올까? 사람마다 고유한 ‘관심분야’가 있는 법이다. 하미 마을 학살은 이념의 렌즈로 볼 필요가 없다. 피해자의 정치성향을 따질 문제도 아니고, 양민이어서 더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여서 문제가 된 사건이었다. 보수주의자라면 더 천인공노할 사건이다. 가령 1968년 2월12일 하미 마을 인근에서 벌어진 퐁니·퐁넛 학살 사건(74명 사망)의 첫 참전군인 증언자 고 최영언(1942~2018) 선생은 지독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살아생전 학살 사건에 관해 딱 한마디로 정리해서 들려주었다. “뭘 복잡하게 말해. 그냥 말도 안되는 일이었어.”

“과거를 덮고 미래로 가자”는 말의 다면성

셋째, 베트남 정부가 아니라 베트남 피해자를 보자.

김순덕 대기자는 베트남 정부가 내세워 왔던 ‘과거를 덮고 미래로 가자’는 말을 칼럼에서 세 번이나 반복했다. 이 말은 베트남 정부가 미국의 경제제재와 캄보디아 침공 뒤의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1990년대 초반부터 주창한 외교적 수사라고 알고 있다. 베트남 정부가 미래를 위한 경제적 협력관계를 우선시하면서 꺼낸 말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과는 1992년 재수교를 했다. 베트남은 무조건 과거를 덮고, 닫고, 묻어버리는 나라인가. 그렇다면 지난 3월 9일 한국 정부가 베트남전 학살 피해 배상판결에 불복해 항소한 것과 관련해 베트남이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힌 경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베트남 외교부의 팜투항 대변인은 “베트남의 정책은 과거를 옆으로 밀어놓고 미래를 보고 가자는 것이지만 이것이 역사의 진실을 부정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한국이 이를 존중해줄 것을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김순덕 대기자는 진실이 다면적이라고 했는데 외교적 수사야말로 다면적이다. 이런 사례는 왜 언급 안 했는지 모르겠다.

베트남 정부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사과할 일

무엇보다 하미 사건은 베트남 정부에 사과할 일이 아니다. 사과 안 해도 된다. 마을의 피해 당사자들과 유족에게 사과할 일이다. 베트남 정부보다 피해자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김순덕 대기자는 피해자들에 관해선 20년 전에 나온 이 전 참사관의 책에만 거의 의지해 풀어간다. “역사를 왜곡해 기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기록하지 않는 것이 낫다”며 연꽃으로 비문을 덮자고 결정하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이 전 참사관 책을 통해 전한 것까지는 좋다. 당시 주민들은 고민 끝에 베트남 중앙당을 배려한 결정을 내렸다.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지혜를 모았다. 하지만 대다수 이들의 마음 속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찜찜한 그 무언가가 남았다는 점도 봐야 한다. 2017년 1월 하미 마을 희생자 49주기 위령제에서 내가 만난 하미 사건 생존자와 유족들은 비문의 복원을 희망했다. 2013년과 2018년에 각각 열린 45주기와 50주기 위령제 때 하미 마을이 속한 디엔즈엉사 인민위원회는 하미 비문 액자를 한국 참배단에 선물하며 그 의지를 간접적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베트남 중앙에서 외교 문제로 민감하다고 하니 그 정도로만 표현한 것이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체념한 주민들도 생겼다. 마을 주민들간의 의견 차이도 있다. 여러 차례 상처를 입으면서 두려워졌다.

하미 마을 사람들의 진심을 알고 싶다면, 국가 차원에서 1968년 하미 마을의 진상과 함께 2001년 비문 사건의 진실도 조사하면 좋겠다.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한국사회에서 공론화된 지 25년 가까이 됐지만 한국 정부는 단 한번도 현지에서 공식적인 조사를 한 적이 없다. 국방부도, 참전군인 단체도 안 했다. 비정부 기구와 언론만 줄기차게 조사와 취재를 했다. 그나마 기대를 걸었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하미 마을의 응우옌티탄(66) 등 피해자들이 신청한 조사개시에 관해 지난 5월24일 제55차 전체위원회에서 각하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 기본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외국인이 전쟁시 입은 피해는 진실규명 범위 밖”이라고 했다.

2000년 5월3일 베트남 하미 마을에서 열린 희생자 위령비 기공식에서 사건 생존자이자 유족인 당티카(가운데)가 오열하는 장면을 외신 카메라 기자가 촬영하고 있다. 1968년 2월 사건으로 인해 당티카의 할머니와 어머니, 언니 2명, 동생 2명을 포함해 마을 주민 135명이 죽었다. 당티카는 총에 맞고 쓰러진 할머니가 당시 3살이던 자신을 꼭 끌어안고 죽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고경태 기자
2000년 5월3일 베트남 하미 마을에서 열린 희생자 위령비 기공식에서 사건 생존자이자 유족인 당티카(가운데)가 오열하는 장면을 외신 카메라 기자가 촬영하고 있다. 1968년 2월 사건으로 인해 당티카의 할머니와 어머니, 언니 2명, 동생 2명을 포함해 마을 주민 135명이 죽었다. 당티카는 총에 맞고 쓰러진 할머니가 당시 3살이던 자신을 꼭 끌어안고 죽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고경태 기자

비문은 잔혹한 선동문이기만 할까

김순덕 대기자는 팩트는 단순하지 않다고 말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무조건 피해자, 한국 참전군인은 무조건 가해자의 자리에 놓는 이분법을 경계하라는 이야기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하미 마을 인근에 주둔하던 한국군 병사들이 다들 미쳐버려 젖먹이를 포함한 노인·여성 등 135명을 몰살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1968년 3월16일 꽝응아이성 선미촌에서 미군이 주민 504명을 하루에 죽인 그 유명한 밀라이 학살 사건도 어떤 오해가 부른 분노의 축적에서 출발했다. 미군 병사들은 밀라이 학살 사건 두 달 전 한국군이 베이스캠프를 지뢰로 둘러싸고 떠난 곳에서 최악의 인명 피해를 겪는다. 미군들은 한국군이 아니라 인근 마을 주민들이 지뢰를 설치했다고 여긴다. 하미 사건도 어떤 오해가 겹쳐져 광기로 돌변했는지는 모르겠다. 이건 더 조사하고 규명할 사안이다. 현재까지의 팩트는 단순하다.

1968년 하미에서 학살이 있었다.

2001년 한국정부의 압력으로 비문을 덮어야 했다.

2023년 하미 마을 사람들은 비문의 복원을 원한다.

과거를 성찰하자는 뜻에서 한국 정부가 2000년대 초반 베트남에 여러 학교를 지어주었다. 잘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시혜를 이유로 위령비 비문이 부적절하다고 압력을 가하고 덮이도록 만든 행위는 하미 주민들에게 평생 가는 또 다른 상처를 남겼다. 여기에 복잡한 다른 진실이 있는 양 본질을 흐리는 것은 과거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마지막 제언 하나. 김순덕 대기자께서는 비문이 연꽃 그림에 덮인 것을 오히려 잘된 일로 보는 듯 한데, 관점의 차이이므로 존중한다. 다만 연꽃에 덮인 비문을 차분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정독해보시길 권한다. 비문은 원한만을 새기는 잔혹한 선동 글이 아니다. 글 안에서 사계절이 순환한다. 절정과 반전이 있다. 난 처절하고 아름다운 서사시로 읽었다.

연꽃 그림에 가려진 하미 마을 위령비 전문

역사책은 기록하기를, 예로부터 디엔즈엉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으로 신성한 기운을 머금은 락롱꿘과 어우꺼의 자손들이 호안선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땅을 넓혀 500년 전 이곳에 나라를 세웠다. 백성들은 하미, 하꽝, 하방, 하록, 지아록 등에 마을을 세웠으며 본디 어질고 선한 그들은 평화롭게 아이를 낳아 키우며 쟁기질과 괭이질로 땅을 일구고 채소를 가꾸고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갔다. 하늘이 고요하고 바다가 잔잔하며 땅이 평온할 때까지는.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천둥 번개가 치더니 적들이 사납게 들이닥쳐 땅에 풍파를 일으켰다. 주민들을 한곳에 모아 전략촌을 세우고 강제로 마을과 고향을 버리게 하였으니 칼로 자르듯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에 주민들은 땅을 잃고 강을 잃고 바다를 잃었으며 농사를 짓고 강과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삶을 잃었다.

지난 5월17일부터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 한베평화재단에서 열리고 있는 하미 마을 시민평화기록전에서 박상환 사진작가가 하미 마을 위령비 비문으로 만든 퍼즐판을 맞춘 뒤 보여주고 있다. 한베평화재단 제공
지난 5월17일부터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 한베평화재단에서 열리고 있는 하미 마을 시민평화기록전에서 박상환 사진작가가 하미 마을 위령비 비문으로 만든 퍼즐판을 맞춘 뒤 보여주고 있다. 한베평화재단 제공

잔악함이여,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이여. 머리가 땅에 떨어져 구르고 피가 흘러 넘치고 끔찍한 전쟁으로 물야자나무 숲은 마른 머리카락이 빠지듯 산산이 흩어지고 강도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몸을 구부리고 밤새 흘린 눈물이 고여 못을 이루었다. 단두대에 잘린 머리가 굴러다니는 광경이 다시 펼쳐지고 사원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으며 하지아 숲은 마른 뼈만 하얗게 남았고 캐롱 선착장에는 주검이 더미를 이루었다.

1968년 이른 봄, 정월 24일에 청룡부대 병사들이 미친 듯이 몰려와 선량한 주민들을 모아놓고 잔인하게 학살을 저질렀다. 하미 마을 30가구, 135명의 시체가 산산조각이 나 흩어지고 마을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모래와 뼈가 뒤섞이고 불타는 집 기둥에 시신이 엉겨 붙고 개미들이 불에 탄 살점에 몰려들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니 불태풍이 휘몰아친 것보다도 더 참혹했다. 참으로 가슴 아프게도 집 문턱에는 늙은 어머니와 병든 아버지들이 떼로 쓰러져 있었다. 전쟁을 피할 수 없었던 어린아이들이 끙끙대며 신음하니 또 얼마나 공포스럽던가. 허둥지둥 시체를 쌓아 올리는데 악의 탄환이 관통하지 않은 시신이 없었다. 시체에는 여전히 마른 피가 고여 있고 아기들은 어머니의 배에 기어올라 차갑게 시든 젖을 찾았다. 입과 턱이 날아간 아이는 목이 타는 듯 말라도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또 하나의 참극이 더해졌으니 탱크의 강철 바퀴가 무덤들을 짓뭉갠 것이다. 황혼이 서린 땅에는 풀이 시들고 뼈들은 말라가고 원혼이라도 나타난 듯 구름은 푸른 하늘에 울부짖었다. 이제 와 생각하니 하늘은 어두울 때도 있으나 밝을 때도 있어 25년간 평화를 일구어 고향에 평온이 찾아왔다. 디엔즈엉 땅에 감자와 푸른 벼가 돌아와 풍년을 이루고 강과 바다에는 물고기와 새우가 넘치며 당의 지도 아래 주민들은 황량한 벌판을 개척했다. 그 옛날의 전장은 이제 고통이 수그러들고 과거 우리에게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슬픔을 안긴 한국 사람들이 찾아와 사과를 하였다.

그리하여 용서를 바탕으로 비석을 세우니 인의로써 고향의 발전과 협력의 길을 열어갈 것이다. 모래사장과 포플러 나무들이 하미 학살을 가슴 깊이 새겨 기억할 것이다. 한 줄기 향이 피어올라 한 맺힌 하늘에 퍼지니 저세상에서는 안식을 누리소서. 천년의 구름이여, 마을의 평안과 번영을 기원합니다. 2000년 8월 경진년 가을. 디엔즈엉사의 당과 정부, 그리고 인민들이 바칩니다.

(한베평화재단 홈페이지에 수록. 작가는 디엔반시의 저명한 문필가 응우옌흐우동)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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