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이 악화해 극단적 선택을 한 20대의 유족에게 보험사가 사망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극단적 선택을 ‘개인의 선택’이 아닌 ‘우울증이라는 질병에 의한 사망’으로 판단해 보험금 지급 의무를 명시했던 기존 판례를 이어가면서도, 보험금 지급 대상이 되는 세부 사례의 범위를 확장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2019년 11월 사망한 25살 ㄱ씨의 유족이 한화손해보험을 상대로 낸 보험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인천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6일 밝혔다.
2010년 14살 때 우울증 진단을 받은 ㄱ씨는 성인이 되어서도 ‘주요우울병’ ‘강박장애’ ‘알코올 의존’ 등을 계속 앓았다. 2018년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낫지 않아 입원치료를 권유받기도 했다. 2019년 5월에는 물품 배송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 수술을 받았고, 일자리마저 잃었다. 신체적·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자 스트레스는 극심해졌다. 2019년 11월 친구와 술을 마신 뒤 ㄱ씨는 가족에게 전화해 “엄마를 잘 챙겨달라”고 당부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ㄱ씨 유족은 일반상해 보험계약을 체결했던 한화손해보험에 ㄱ씨의 사망보험금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보험사는 “정상적인 분별력을 갖고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상태였다”며 보험금 지급을 거부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 보험금은 지급되지 않는다. 자신을 해치겠다는 자유의사가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해쳤다면 보험금이 지급된다. 유족은 ㄱ씨가 만성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만취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사망에 이르렀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중학교 입학 무렵부터 정신병적 증상을 갖고 있던 ㄱ씨가 사망 1년 전부터 입원치료 등을 받아야 할 정도로 (증상이) 심각한 상태로 발전했다. 신체적·경제적 상황이 나빠지면서 정신병적 증상을 악화시켰다. (사망 당시) 술을 많이 마신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자신을 해친 것으로 보인다”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2심은 원고 패소로 1심을 뒤집었다. ㄱ씨가 △주요우울증 진단을 받았고 △사망 직전 음주를 했으며 △신체적·경제적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인정하면서도, △사망 직전에 가족과 통화할 정도로 자신의 행위가 지닌 의미를 인식했고 △자살 방식이 충동적이거나 돌발적이지 않다며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판단을 달리 했다. 대법원은 ㄱ씨가 9년 전부터 주요우울병 진단을 받았고 사망하기 1년 전에는 입원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을 겪으면서 죽음을 생각해온 것으로 보인다는 점, 사망 즈음 신체적·경제적·사회적 상황이 지극히 나빠졌다는 점, 사망 직전 술을 많이 마신 탓으로 우울증세가 급격히 악화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대법원은 ‘가족에게 전화하거나 특정 방식을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유로운 의사로 선택한 죽음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봤다.
보험 사건 전문인 박기억 변호사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2022년 대법원이 우울증 뒤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에 대해 보험금 지급을 인정하며 ‘함부로 (우울증이라는) 의사 판단을 뒤집으려 하지 말라’고 판결했고 이후 비슷한 판단을 내놓고 있다”며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닌 ‘우울증이라는 질병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현실을 인정했다는 차원에서 바람직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 자살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전문가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전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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