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16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고층 건물 옥상에서 10대 여성 청소년이 뛰어내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투신 전 인스타그램 실시간 방송을 켜고 “‘울갤’ 접으시고”라고 말했다. ‘울갤’은 국내 최대 규모 온라인 커뮤니티로 알려진 디시인사이드의 ‘우울증 갤러리’ 게시판을 가리키는 줄임말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울증 갤러리에서 성인 남성이 우울 증상을 호소하는 여성을 상대로 성폭력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울증 갤러리는 성폭력을 포함한 각종 범죄의 온상으로 지목됐다. 경찰은 우울증 갤러리 내에서 발생한 성폭력·자살 방조 등 의혹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
정부는 경찰 수사와 별개로 청소년 보호 방안을 마련했다. 사건 발생일로부터 24일째 되는 날인 지난 5월9일, 청소년 정책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는 관계부처 합동대책인 ‘신·변종 유해환경으로부터 청소년 보호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변종 룸카페, 마약류, 도박, 온라인 성착취 등 청소년 대상 불법·유해환경을 선제적으로 차단해 청소년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에 방점이 찍혔다.
여가부는 또 이달 1일 청소년 보호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전문가 간담회를 열었다. “최근 사회적 우려가 심화되고 있는 우울증 갤러리 등 온라인 게시판을 통한 유해환경 노출로부터 청소년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방안 모색”이 간담회 개최 배경이었다. 정부가 발표한 종합대책에서는 청소년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과 문화를 바꾸는 정책은 찾아볼 수 없다.
이번 사건을 ‘청소년이 유해환경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하면 막을 수 있는 일’로 단순화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지난 14일 저녁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우울증이 덫이 되지 않으려면’이라는 이름의 집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모인 전문가들은 10대, 특히 10대 여성 청소년이 온·오프라인에서 입는 여러 피해를 구조적인 문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집담회에는 40여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지난 14일 저녁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열린 ‘우울증이 덫이 되지 않으려면’ 집담회에서 김신아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가운데)가 ‘우울증 갤러리와 강간 문화’를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우울증 갤러리 성폭력, 문제는 강간 문화
발표자로 나선 김신아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우울증 갤러리 안에서 성인 남성이 10대 여성을 대상으로 성폭력을 저지르는 일이 많았다는 점을 언급하며 “그 이면에는 온라인 상에서 우울증을 가진 여성들을 ‘성적으로 이용해도 괜찮은 문란한 존재’로 만드는 문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남성 사이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과 성적 괴롭힘을 용인하고, 강간을 범죄가 아닌 보통의 성적인 관계로 여기는 강간 문화의 전형이다. 실제 디시인사이드, 에펨코리아와 같은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우울증 여자 꼬시는 방법’과 같은 제목의 글이 올라와 있다.
이에 대해 김신아 활동가는 “폭력적인 성관계 경험을 자랑하는 행위는 강간을 놀이로 간주한 남성 문화의 일종이며, 여성에 대한 강간이나 폭력, 통제를 부추기는 행위”라고 말했다. 그는 피해 여성 청소년 개인의 심리적, 정서적 취약성만을 강조한다면 이런 강간 문화를 해체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신성연이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는 온라인 공간의 불평등한 성별 분업 구조를 지적했다. 신성연이 활동가는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의 폭력적인 정서가 남초 커뮤니티의 전반적인 흐름으로 자리잡으면서, 온라인 공간은 여성에게 더욱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해환경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겠다는 것은, 청소년들이 우울증 갤러리에 접속하지만 않는다면 성착취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 틀을 만들게 되는 것”이라며 “취약한 여성을 타깃으로 하는 성착취 범죄는 우울증 갤러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온라인 공간에서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앞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지난 5월22일 경찰이 우울증 갤러리 임시 접속 차단을 요청하자 “게시판 전체에 대해 시정요구 조치를 하는 것은 과잉 규제 우려가 있다”며 ‘자율규제 강화’ 권고를 의결했다.
지난 14일 저녁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우울증이 덫이 되지 않으려면’이라는 이름의 집담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구조적 폭력의 결과로 나타나는 여성 우울
이번 사건을 파악할 때, 온라인에 친숙한 청소년 세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호연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은 “청소년의 취약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가족, 친구, 학교 선후배, 또래 관계와 같은 사회적 관계망을 전체적으로 조망해야 한다”며 “어떤 청소년에게는 온라인 환경이 무료한 일상을 달래는 공간이지만, 어떤 청소년에게는 일상이 너무 힘들어서 몰입하게 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힘든 일을 오프라인 공간에서 누군가에게 털어놓았을 때 돌아오는 반응이 공감·이해가 아니라 무관심·비난과 같은 부정적인 내용이라면, 익명성이 보장된 온라인 공간에서 만난 낯선 사람에게 얘기하는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청소년에게 있다는 것이 호연 연구원의 설명이다. 이런 상황은 자칫 그루밍 성폭력(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접근해 친분을 쌓아 심리적으로 지배하면서 성적으로 착취하는 성폭력)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호연 연구원은 “(폭력, 빈곤, 학교 부적응, 관계 단절 등) 취약한 환경에 놓여 있는 청소년은 안전에 대한 감각이 떨어질 수 있다“며 “가정과 학교에서 관계 단절을 경험할 때 온라인상에서 자신의 고통을 공유하고 타인으로부터 이해를 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청소년들은 말한다”고 전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10대 여성 청소년의 우울 증상은 청소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 만연한 구조적 폭력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트라우마치유센터 사회적협동조합 사람마음의 최현정 임상심리전문가는 “(감정 조절이 어려워 일상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경계성 성격의 주요 위험 요인은 아동기 성학대 경험으로 알려져 있다”며 “경계성 성격을 지닌 사람 모두가 아동기 때 성학대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정신건강 진단에 비해 아동기 때 학대, 방임, 폭력을 경험한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경계성 성격을 가진 사람이 경험하는 흔한 감정은 외로움과 공허함, 불안과 공포다. 또 자기 비난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현정 임상심리전문가는 “여성과 성소수자에게 경계성 성격 양상이 높게 나타난다고 추정되는 이유는, 이들이 존재가 부정되는 일을 겪었다는 데에 있다”고 밝혔다. 여성 청소년을 위협하는 온·오프라인 환경이 바뀌지 않았는데 이들에게 ‘보호해줄테니 정상 사회로 돌아오라’는 손길은 기만일 수도 있다는 것이 최현정 임상심리전문가의 말이다.
이민아 중앙대 교수(사회학과)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경험은 성별에 따라 달라진다”며 “여성이 남성보다 성폭력 피해자가 될 확률이 높은 것은 이같은 차별적 노출과 차별적 취약성의 대표적 사례”라고 말했다. 대검찰청의 ‘범죄분석’ 통계를 보면 2021년 기준 성폭력범죄 피의자 4만810명(신원미상 제외) 중 90.3%(3만6869명)가 남성이고, 피해자 3만1418명(신원미상 제외) 중 90.4%(2만8402명)가 여성이다.
폭력과 차별을 직접 겪는 것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이민아 교수의 설명이다. 이민아 교수는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는 젠더 폭력 기사들은 성별에 따라 다르게 감정 이입을 할 수밖에 없다. 젠더 폭력에 대한 직접 노출과 간접 노출은 여성에게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불안, 분노 등 부정적 감정을 양산한다”며 “세상은 굉장히 위험한 곳이고, ‘나도 언젠가 피해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해결책은 현실에 대한 진단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여성에게 안전한 사회가 필요한 이유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 자살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전문가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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