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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뗀석기·주먹도끼 작명했던 손 선생, 돌조각 하나에 심장이 멎다[본헌터⑥]

등록 2023-07-12 11:00수정 2023-07-17 14:48

[역사 논픽션 : 본헌터⑥] 슬기슬기 손 선생
인생의 거울이 된 1세대 고고학자, 그를 넘어설 수 있을까
손 선생은 1964년 공주 석장리의 구석기 유물을 발굴하면서 고고학계의 스타가 되었다. 석장리 유적 발굴 현장에서. 왼쪽에서 네 번째가 손 선생이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선주.
손 선생은 1964년 공주 석장리의 구석기 유물을 발굴하면서 고고학계의 스타가 되었다. 석장리 유적 발굴 현장에서. 왼쪽에서 네 번째가 손 선생이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선주.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바둑은 두지 말게.”

손 선생이 말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인사차 들른 자리였다. 손 선생은 또 말했다. “골프도 치지 말게.” 바둑과 골프를 하면 시간을 빼앗긴다고 했다. 손 선생은 고지식했다. 술 담배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선주는 세속적인 편이었다. 그래도 스승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유학 기간 바둑과 골프를 멀리 했다.

공부할 시간도 빠듯했다. 선주는 바둑과 골프 대신, 언제나 그렇듯 합기도를 했다. 버클리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한 뒤에는 개인 수련을 넘어 학생들을 상대로 가르쳤다. 패스 여부만 결정되는 1학점짜리 피이(PE, Physical Education) 과정이었다. 미국의 대학에선 이론을 가르치는 프로페서(professor)와 실기를 가르치는 인스트럭터(instructor)를 구분했다. 그는 버클리대학의 학생이자 합기도 강좌의 인스트럭터가 되었다.

손 선생이 아니었다면 길고 긴 학문의 길을 걷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학을 결심했을 때 다른 대학은 떠오르지 않았다. 손 선생이 다녀왔다는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만 머릿속에 있었다. 손 선생은 한국전쟁의 포화가 멎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듬해인 1954년 서울대 교수생활을 정리하고 버클리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1963년까지 10년간 그는 그 곳에서 ‘조선 전기의 정치구조’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종대왕 재위 기간 집현전 세력과 훈구 세력과의 관계를 통해 조선 시대의 정치·사회상을 연구한 결과였다.

손 선생은 연희전문학교에서 벽초 홍명희 선생의 큰 아들 홍기문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조선왕조실록>을 독파했다고 했다. 그 뒤 미국 대학에서 조선시대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과정을 밟은 한국의 사학자가 고고학자로 더 알려지게 된 것은 뜻밖의 운명이었다.

손 선생은 고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의 학자들은 유적을 발굴한 경험이 없었다. 더구나 남한에는 정식으로 구석기 고고학을 공부한 학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손 선생은 서울대 교수 김원룡과 함께 구석기를 연구하는 1세대 학자가 되었다.

그 윗 세대로는 1930년대 오스트리아 빈과 독일 뮌헨에서 각각 공부한 도유호와 김재원이 있었다.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도유호는 1946년 월북해 김일성대 교수와 북한의 고고학연구소장이 되었다. 김재원은 미군정 하에서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해 국립박물관을 건립했고 관장이 되었다. 김재원이 키운 제자가 손 선생의 라이벌 격인 김원룡이었다.

인생은 알 수 없었다. 선주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손 선생이 맞이했던 어떤 급격한 변화가 곧 자신의 것이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아주 빨리.

선주는 고등학교 시절 전자공학과나 원자력공학과를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1967년 대학입시에서 한 대학 전자공학과에 도전했다가 미끄러졌다. 재수를 했다. 이듬해엔 이과에서 문과로 바꿨다. 사학과를 지원했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미국의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 같은 기자가 되겠다고 꿈꾸었다. 서울사대부고에서 신문반과 교지반 반장을 했던 추억을 새삼 새기며 천관우 홍종인 같은 언론인의 이름을 떠올렸다. 역사를 알아야 사회를 보는 눈이 생기는 법이었다.

그런데 입학하자마자 언론인의 꿈 따위는 물건너갔다. 박물관장이 불렀다. 과 수석으로 들어온 선주를 눈여겨 본 것이다. 박물관에서 일 좀 하라고 했다. 그 일이란 주마다 나가는 발굴 작업이었다. 박물관장은 바로 손 선생이었다.

손 선생은 1964년 공주 석장리의 구석기 유물을 발굴하면서 고고학계의 스타가 되었다. 신문 지면에도 등장했다. 손 선생은 석장리 현장에 처음 가서 본 작은 돌조각 이야기를 했다 심장이 멎을 뻔 했다고 했다. 뗀석기. 돌을 깨뜨려 만든 선사 시대의 생활도구. 이건 구석기 유물이라고 확신했다.

공주 석장리 유물은 우리 나라에도 구석기 시대가 있음을 증명한 유적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금석병용기 설이 우세했다. 청동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전에 순동 중심의 동기와 석기가 함께 사용되던 시대가 있었다는 설이다. 금석병용기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공주 석장리 유물의 발굴 소식을 듣고도 한반도의 구석기 시대를 인정하지 않았다.

선주가 대학에 들어올 쯤에야 구석기 시대가 드디어 학계의 공인을 받았다. 우리나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게 그 전에 알려진 시기보다 짧게는 수만년에서 길게는 백만년 쯤 당겨질 수 있다는 말이었다. 선주는 주말마다 공주 석장리 금강변으로 갔다. 그 곳에서 유물 발굴 작업을 했다.

손 선생은 오늘의 선주를 만든 거울 같은 존재였다. 대부였다. 직관과 열정, 과학적 사고의 방법을 배웠다. 손 선생은 발굴 현장에서 돌이 나오면 묻고 또 물었다. 어떻게 쓰여졌을까. 누가, 왜, 어떻게 만들었을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우리말 고집이었다. 외국어를 우리 말로 고쳐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찾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손 선생은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시절 틈만 나면 선배였던 윤동주를 찾아가 기숙사 다락방에서 밤을 지새우며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노라고 했다.

뗀석기는 손 선생이 만든 말이었다. 그것은 본래 영어로 플레이크 툴(flake tool) 또는 한자어로 박편(剝片)이었다. 핸드 액스(hand axe)는 주먹도끼로 바꾸었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슬기 슬기 사람으로 바꾸었다. 유적에서 나오는 사람 뼈 용어도 한글로 썼다. 가령 허벅지 근육을 힘살마루라고 했다. 선주는 학자의 이력이 쌓이며 손 선생과 함께 우리 말 용어를 만들었다. 손쓴 사람(호모 하빌리스), 곧선 사람(호모 에렉투스)따위였다. 손 선생은 우리말 용어를 만든 뒤엔 꼭 국문과 교수들을 찾아 감수를 요청했다.

선주가 보기에 손 선생의 우리말 사랑은 윤동주보다 연희전문 스승이었던 외솔 최현배의 영향이 더 컸다. 최현배는 비행기를 날틀로 쓰자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손 선생 덕분에 고고학은 우리나라 학문 분야에서 보기 드물게 순우리말 용어를 널리 쓰는 분야가 되었다. 손 선생은 일본어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공주 석장리 유적지에 일본 사람이 견학을 오면 손 선생은 영어를 썼다. 식민지 시절에 태어났고 심지어 해방 직전 규슈제국대학에서 유학했으므로 일본어가 통하지 않을리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영어를 썼다. 일본 학자들이 영어가 짧다고 하면 통역을 구해오라고 했다.

발굴 현장에서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도 손 선생에게 배웠다. 발굴단장이라고, 교수라고 뒷짐을 지지 않았다. 대신 직접 지게를 지고 흙을 퍼날랐다. 챙이 좁은 모자에 청바지와 장화, 그리고 점퍼 차림으로 현장에 나왔다. 영락없는 흙일꾼이었다. 힘든 발굴을 마치고 나면 밤 늦게까지 유물 정리를 했다.

젊은 학생들은 어떻게든 술맛을 본 뒤 자려고 했다. 때로 음주계획에 성공하고 새벽에 돌아온 뒤 늦잠에서 깨어나 발굴 현장에 나간 학생들은 홀로 땅을 파는 손 선생의 모습에 기겁을 했다. 선주가 뒷날 현장에서 삽이나 호미를 들 때면 늘 머릿 속에 손 선생이 그려졌다.

손 선생은 청출어람이란 말을 좋아했다. 선주도 그 말을 좋아했다. 스승을 넘어서는 제자. 스승의 학문적 업적보다 한발 더 나아가는 제자.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해야 했다. 선주가 버클리에 간 이유였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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