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납북귀환 어부들이 50년의 기다림 끝에 지난 5월 12일 오후 춘천지법에서 열린 재심에서 마침내 무죄를 선고받은 뒤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학교 서무 직원이던 한삼택(당시 38살)씨는 1970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학교 기부금을 보내준 재일동포 가운데 조총련 인사가 있었다는 이유였다. 한씨는 1971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직장을 잃은 뒤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갔다. 아들과 딸은 ‘간첩의 자식’이라는 낙인 속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축농증이 심한 줄로만 알았던 코에는 암이 있었다. 제대로 수술도 못 받고 1989년 57살에 세상을 떠났다.
고 한삼택씨네 가족이 1968년에 찍은 막내동생 첫돌 기념 가족사진. 한경훈씨 제공
한삼택씨의 아들 한경훈(62)씨는 간첩으로 몰렸던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고자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문을 두드렸다. 2여년간 조사 끝에 진실화해위는 경찰이 구속영장도 없이 한삼택씨를 불법감금하고 가혹행위를 했다고 결론 내렸다. 한경훈씨는 지난 2월 재심을 청구했고, 3개월 만에 법원도 “불법구금·가혹행위”를 인정하며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검찰은 즉시항고했다. “(1970년대) 재심 대상 사건에 관여한 판사는 피고인(한삼택)을 직접 보고 진술을 듣고 신문을 하기도 했는데, 원심은 그런 절차도 밟지 못한 상태”라는 이유를 들었다. 사망한 한씨를 법정에 다시 불러 세워야 한다는 ‘상식 밖의 주장’으로 52년 만에 누명 벗을 기회를 가로막은 것이다. 한씨 재심 개시 여부는 항소심에서 다시 결정해야 한다.
30일 한겨레는 대검찰청 공안부가 작성한 실무 지침 ‘과거사 재심 대응 매뉴얼’(재심 매뉴얼)을 확보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7년 8월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은 ‘권위주의 정부 시절 검찰이 인권을 지켜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며 사과했고, 2019년 이 매뉴얼을 만들었다.
대검찰청 공안부가 2019년 6월 작성한 ‘과거사 재심 대응 매뉴얼’.
매뉴얼은 검찰이 습관적으로 해온 ‘재심 개시 결정 반대’를 자제하는 방향으로 짜여 있다. △기록상 불법구금·불법체포 등 재심 사유가 명백한 경우 재심 개시 의견 개진 △법원 재심 개시 결정에 명백한 오류가 없는 한 즉시항고 부제기(제기하지 말 것) △법원의 ‘즉시항고 기각 결정’ 시 ‘법령 적용이나 해석 오류’가 없는 한 재항고 부제기 등이 주요 내용이다. 법원의 판단에 ‘법령 적용이나 해석 오류’가 없는데도 즉시항고를 제기한 위 사례는 이 매뉴얼과 배치된다.
이외에도 윤석열 정부 검찰은 재심 매뉴얼을 위반하며 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에 잇따라 즉시항고하고 있다.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사건’에 연루돼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던 고 윤이상 작곡가 사건도 비슷한 경우다. 유족이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3년 만인 지난 5월 수사기관의 불법행위를 인정하며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검찰은 즉시항고했다. 윤씨 재심 개시 여부는 대법원에서 다시 다투게 됐다. 김필성 변호사(법무법인 가로수)는 “고문과 가혹행위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과거사위) 조사로 인정돼 보고서까지 나왔다”며 “(항고한) 검찰은 과거사 재심에 의지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대검 관계자는 “매뉴얼은 그냥 매뉴얼일 뿐이지 법률이나 규칙이 아니라서 해석의 여지가 있다”며 “사안에 따라서 (매뉴얼의 해석이) 다 다르고, 모든 걸 다 (매뉴얼로) 적용하게 되면 검사의 역할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법원의 재심 결정에 대해 즉시항고하는 검찰의 관행을 바로잡고자 형사소송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2018년 국가인권위원회는 검찰의 재심에 대한 즉시항고권을 폐지하거나 재항고 사유 제한을 검토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독일은 1964년 재심 개시 결정에 대한 검사의 즉시항고권을 폐지했다.
논문 ‘재심 개시 결정에 대한 검사 즉시항고의 비판적 고찰(2020)’을 쓴 김도윤 변호사는 “검찰이 재심 개시 결정에 즉시항고를 하면 이중, 삼중의 낭비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는 “당사자가 애쓰지 않아도 과거사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삶은 회복돼야 한다”며 “법원판결에 심각한 하자가 없는 한 검찰은 재심개시를 인정하고, 재심 법정에서 과거 사건의 증거를 다시 판단 받자는 데 합의가 이뤄졌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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