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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우리 가족 죽이고, 우리집에서 살았는가? [본헌터⑪]

등록 2023-07-31 10:58수정 2023-07-31 16:29

[역사 논픽션 : 본헌터⑪] 새지기2-2의 추리
양반집에서 머슴집까지 살해당한 여섯 가족, 나는 어느 집 자식이었나
충남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에서 백암리로 가는 산길이다. 오른쪽 큰 나무 그늘 밑에서 나는 발견되었다. 황골 마을에서 100여미터의 언덕을 오르고 나면 여기서부터 아래로 경사진 길이 나온다.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이 서늘하다. 누군가에게는 사람 죽이기 딱 좋은 곳이었다. 고경태 기자
충남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에서 백암리로 가는 산길이다. 오른쪽 큰 나무 그늘 밑에서 나는 발견되었다. 황골 마을에서 100여미터의 언덕을 오르고 나면 여기서부터 아래로 경사진 길이 나온다.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이 서늘하다. 누군가에게는 사람 죽이기 딱 좋은 곳이었다. 고경태 기자

*편집자 주: ‘본 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동무인가 악마인가.”

지난번에 나는 물었다. 나보다 1년 먼저 세상에 노출된 거무스르한 낫에 감사와 증오 중 어떤 감정을 표현해야 할지 질문했다. 나는 2023년 4월9일 충남 아산시 황골 새지기의 단풍나무 아래서 73년 만에 노출된 새지기2-2다. 내 옆에서는 엄마로 추정되는 새지기2-1이 나왔다.

나는 열네살 또는 열다섯살의 아이로 분석되었다. 그러나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모른다. 누구의 집 자식인지, 나와 함께 노출된 새지기2-1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힘겨운 추리를 해본다. 1950년 내 고향 황골 속으로 들어가 본다. 가장 결정적인 질문은 두 가지다. 누가 죽었는가. 누가 죽였는가. 두 가지 열쇠를 풀다 보면 나의 정체가 드러날지도 모른다.

전쟁의 와중에도 추석 명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황골은 120여 가구 800여명이 거주하던, 시골치고는 꽤 규모 있는 마을이었다. 누군가는 들떴고, 누군가는 숨죽였으리라. 단파 라디오를 통해 인천상륙작전 소식이 들려왔다. 아산 읍내에도 곧 미군 탱크가 들어온다고 했다. 인민군의 지배는 90일을 넘기지 못했다. 세상은 다시 뒤집혔다.

가장 먼저 승우가 불려 나갔다. 해방 전까지 북녘 진남포의 건설현장 책임자로 일하다 소련군이 들이닥치자 낙향했던 인물이다. 마을 유지들의 권유로 인민위원장을 맡았다. 1950년 9월25일, 추석 전날이었다. 함께 사는 사촌 동생 승완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변소(화장실)에서 일을 보는데 승우의 후처이자 사촌 형수 임순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방님 큰일 났어요. 동네 사람들이 형님을 잡아갔어요.”

승완이 곧바로 마을로 나가보니 동네가 벌집 쑤신 듯 난리가 나 있었다. 공회당 골방에 승우가 잡혀 와서 손목이 결박된 채 피투성이가 돼 있었다. 그 길로 10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낡은 터’라 불리는 곳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밤이 된 뒤 또 마을 사람들이 끌려나갔다. OO이 집행위원장이 되어 있었다. 승우의 처 임순은 아들 영화, 젖먹이 어린애와 같이 끌려나갔다. 탕정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큰아들 경화만 집에 없었다. 나는 혹시 승우의 아들 영화인가?

나 새지기2-2는 뼈조각으로 발굴되어 지난 4월 감식을 받았다. 내 오른쪽 옆은 엄마로 추정된 새지기2-1이다. 고경태 기자
나 새지기2-2는 뼈조각으로 발굴되어 지난 4월 감식을 받았다. 내 오른쪽 옆은 엄마로 추정된 새지기2-1이다. 고경태 기자

우영의 일가족도 죽었다. 승우 일가족이 첫 희생자가 된 뒤 우영은 “나쁜 새끼들”이라며 분을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 장면을 목격한 가해자들이 우영을 찍었다. “저놈 가만 놔두면 큰일 나겠다”는 판단을 했을 거다. 우영과 처, 세 아들이 끌려갈 때 우영과 혼사를 맺은 규남네가 “왜 우리 사돈 잡아가냐”고 항의했다. “빨갱이 편든다”는 이유로 규남 일가족까지 끌려가서 모두 죽었다. 우영의 집은 시파집이라 불렸다. 그는 충무공의 후손이었다. 우영네를 죽인 OO네 두 형제 중 동생네가 우영네 집을 차지했다. 나는 혹시 우영네 집 아들 중 하나였나, 아니면 우영의 사돈 규남네 아이였나.

문유 일가족도 모두 죽었다. 문유는 황골에 있는 한 양반 가문 문중에서 대부로 불렸다. 나이는 어리지만, 항렬이 가장 높아서다. 그는 인민군이 들어오자마자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전투중에 포로로 잡혀 거제포로수용소에 갔고 다행스럽게도 전쟁이 끝난 뒤 황골에 돌아왔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향 집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전혀 다른 사람들이 문유를 맞았다. 나이는 많지만 조카뻘 되는 사학을 비롯해 부인과 일가족은 모두 죽임을 당한 상태였다. 도합 열네명이었다. 만삭이었던 부인은 같은 아산의 탕정면 명함1리 친정에 가 있어 화를 피할 수도 있었다. 가해자들은 그곳까지 찾아가 세 번의 시도 끝에 납치에 성공했고, 죽였다. 나는 문유 집안의 아이였을까?

황골은 양반촌이었다. 남양 홍씨, 덕수 이씨, 해평 윤씨, 평강 채씨 문중의 사람들은 양반 행세를 했다. 조상을 사당에 영구히 모시는 불천위 제사를 지내던 집안도 있었다. 1950년에만 해도 반상의 구별이 존재했다. 궁금하다. 나는 양반집 아이였나, 평민의 집 아이였나, 아니면 머슴 집 아이였나. 전쟁통에 다들 눈이 뒤집히자 양반의 체통이나 법도 따위는 개한테 줘버린 이들이 있었다. 양반은 학살의 주동이 되었다. 학살의 배후조종자가 되었다. 양반이 양반을 죽였다.

피해자 중엔 허드렛일을 하는 머슴 출신도 있었다. 대대로 양반의 가마를 끈 가마꾼이었다 하여 가마꾼 집안이라 불렸다. 그들이 잠시 인민위원회의 깃발 아래서 완장을 찬 게 화근이었다. ‘감히’ 양반 집 이씨 할아버지를 멍석말이하는데 동원된 것이다. 가마꾼 두 집도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죽었다. 가마꾼이라서 서러웠다. 아무도 성과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았다. 나는 두 가마꾼 중 한 집안의 아이는 아니었을까.

2023년 4월, 나 새지기2-2를 찾아낸 사람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단풍나무를 벤 곳에서 내가 나왔다. 주용성 작가 제공
2023년 4월, 나 새지기2-2를 찾아낸 사람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단풍나무를 벤 곳에서 내가 나왔다. 주용성 작가 제공

나는 정말 누구인가. 황골에서는 서너 차례에 걸쳐 80여명이 죽었다. 죽임을 당한 집들을 다시 정리해본다. 승우네 집, 우영네 집, 우영 사돈 규남네 집, 문유네 집, 가마꾼 두 집. 총 여섯 집이다. 나는 승우의 아들 영화는 아니다. 당시 영화는 10살이었다. 나보다 네댓 살 아래다. 그렇다면 다섯 집이 남는다.

이 중에서 유일하게 죽은 이들의 이름이 밝혀진 곳은 문유네 집이다. 사학과 그의 부인 학선은 각각 25살, 20살이었다. 나머지 필유, 박씨, 옥순, 인순, 이순, 사범, 사억, 사숭, 사충, 지순, 영선, 웅선 모두 성별만 알 뿐 나이를 알 수 없다. 우영과 함께 희생당한 세 아들도 나이를 알 수 없다. 나머지 규남네와 가마꾼 두 집은 자식이 몇 명이었는지조차 정확히 모른다. 여섯 가족 외에 죽은 사람들은 더 있을지 모른다. 세세하게 증언해 줄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에 없다. 나의 존재는 미궁에 빠졌다.

승우의 사촌동생 승완은 승우가 고문당했던 공회당에 끌려가 몽둥이찜질을 당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인민재판에서 호선 엄마가 죄가 없다고 거들어줘서 살았다. 승완과 함께 끌려간 친형수와 3살 세화, 돌쟁이 민화도 일단 살았다. 승완은 생전에 툭툭 던지듯 말했다. “낫으로 죽였어.” 승완과 어울려 지냈던 동네 어른들이 대꾸했다. “OOO이가 쇠뭉치를 휘둘렀지.” “몽둥이로 때려죽였어.” “OOO가 아주 잔학했지” “얼마나 잘 먹었으면 이렇게 두드려 패도 안 죽냐는 말까지 하며 죽였다고 했어.” 그리고 또 그 이름들을 댔다. “OO이 대한청년단장을 했지. 그 사람 형님 위세가 대단했어.” “OO집도 있지. 거기도 형제야. 인민군 때 부역하다 인민군 물러가니까 부역자 잡겠다고 돌변해서 사람들을 죽였어.”

2023년 7월 나를 발굴한 장소엔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다. 고경태 기자
2023년 7월 나를 발굴한 장소엔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다. 고경태 기자

죽인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집을 차지했다. 시파집만 그런 게 아니었다. 승우의 사촌동생 승완도 죄인이 되어 집에서 쫓겨났다. 인민위원장을 지냈다 하여, 인민위원회를 위해 밥을 해줬다 하여, 아들이 좌익운동을 한다고 소문이 났다 하여, 인민군 점령기에 완장을 차고 양반을 모욕했다 하여 죽임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겼다. 죽거나 쫓겨난 사람 집에 가해자쪽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

내가 빈한한 집에서 봄마다 보릿고개에 시달렸다면, 내 집은 사람 손을 타지 않고 있다 폐가가 되었겠다. 내가 부잣집에 살았다면 세간살이는 다 뜯겨나갔겠다. 내가 살던 방의 아랫목에서 행복한 꿈을 꾸다 편안하게 잠들었을까. 지금도 살고 있을까. 아니면 이제는 대처로 나갔을까.

살아남은 승완, 즉 승우의 사촌동생은 이후 황골에서 3남4녀를 낳고 살았다. 살육극이 벌어진 뒤 영원히 고향을 등진 이도 있었지만, 승완처럼 꾸역꾸역 원수들의 얼굴을 보며 살아간 이도 적지 않았다. 남화는 2005년 세상을 떠난 승완의 아들이다. 1966년 황골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 형 철규에게 고향에서 사람 죽은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남화는 아버지의 원래 집을 친구네 가족이 차지하고 살았던 일을 떠올렸다. 주인이 바뀐 시파집에서 처음 먹어본 바나나의 달콤함을 잊지 못했다. 남화는 새지기 사건을 광범위하게 조사했다.

2023년 7월, 내가 노출된 장소에는 원래 있던 단풍나무 토막들이 남겨져 있다. 고경태 기자
2023년 7월, 내가 노출된 장소에는 원래 있던 단풍나무 토막들이 남겨져 있다. 고경태 기자

남화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동네 사람들간의 학살극은 좌우대립과는 거리가 있었다.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문중간의 갈등이 나왔다. 토지 소유와 경작을 둘러싼 분쟁이 나왔다. 여름에 멱을 감다 죽은 자식에 대한 책임전가와 원망이 나왔다. 이념보다 사적인 감정이 먼저 작용했다. 새지기에서 낫을 찾던 순간에도 남화가 있었다. 남화, 내가 누구인지도 찾아다오.

남화는 2022년 국가기관에 새지기 진실규명 신청을 했다. 2006년, 남화 이전에도 같은 신청을 한 사람이 있었다. 2008년 국가기관의 조사관이 새지기를 찾아왔다. 조사관은 새지기에서 주민들에게 말을 걸다 얼어붙었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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