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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사람 뼈 못 구하면, 마을 폐묘라도 파내라 [본헌터⑫]

등록 2023-08-02 11:00수정 2023-08-02 11:28

[역사 논픽션 : 본헌터⑫] 점말동굴에서 살다
처음 나온 구석기 동물뼈를 분석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시절
1970년대 초반, 제천 점말동굴 발굴 현장에서. 맨 오른쪽이 손 선생. 맨 왼쪽이 선주.
1970년대 초반, 제천 점말동굴 발굴 현장에서. 맨 오른쪽이 손 선생. 맨 왼쪽이 선주.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뼈들에 압도당했다.

선주는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한 1980년 첫 학기부터 뼈대학 수업을 들었다. 학부 3,4학년생과 석사·박사과정생 다 합쳐 10명이 정원이었다. 3학점짜리로 일주일에 세 시간을 1년 동안 수강했다. 실험실에서 실습하는 랩은 주 20시간이었다. 대학 박물관 지하에는 전 세계에서 모인 수천개의 사람 뼈가 있었다.

머리뼈부터 발끝까지 모든 뼈를 보고 만지고 분석하는 시간이었다. 조각난 뼈들을 앞뒤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나이, 성별, 키를 어떻게 분석할지, 질병 관계와의 상관성을 어떻게 찾아낼지를 공부했다. 뼈 공부에서 ‘스텝 원’은 뼈를 보자마자 사람인지 동물인지를 구분하는 거였다. 그 다음엔 긴 뼈냐 짧은 뼈냐, 평평한 뼈냐 볼록한 뼈냐, 위쪽이냐 아래쪽이냐,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어른 것이냐 아이 것이냐 하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학기 말에는 이른바 ‘땡 시험’을 보았다. 뼛조각을 잠깐 보여주고 바로 이름을 대야 했다. 주어진 시간은 20초. 20초 단위로 종이 울리며 뼈들이 지나갔다. 끝없이 보고 또 봐야만 눈썰미가 생겼다. 사랑니 하나엔 난 작은 흔적을 갖고 어떻게 보아야 할지 머리를 싸매며 토론했다.

고동물학 수업도 1년간 들었다. 4층 건물 전체가 고동물학과 실습실과 수장고였다. 보고 싶은 동물 뼈를 맘대로 보라고 했다. 척추동물인 포유강에 속하는 동물군들의 뼈로 꽉 차 있었다. 종일 보아도 다 볼 수가 없었다. 공룡 수업을 따로 듣기도 했다. 뼈들에 둘러싸여 행복했던 선주는 사람 뼈와 동물 뼈를 구하지 못해 애태우던 한국에서의 지난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64년 공주 석장리 유적이 발굴되면서 한반도에 구석기 시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찌르개, 밀개, 주먹도끼, 외날찍개, 긁개, 자르개, 새기개 등의 석기류가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그러나 이후 진전이 없었다. 무엇보다 동물 뼈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1966년 북한의 평안남도 상원읍에 있는 검은모루 동굴에서는 각종 동물 화석과 석기가 발견됐다. 이들은 100만년 전 혹은 70만년 전의 것으로,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으로 평가됐다. 구석기 시대 동물이 한반도 북쪽에서만 살았을 리는 없다. 분명히 남쪽에도 흔적이 있을 거였다.

고고학자들은 충청북도에서 동물 뼈가 나올 수 있다고 보았다. 뼈와 나무 같은 유기물이 땅속에서 오래 보존되려면 건조한 알칼리성 토양이어야 했다. 그곳이 바로 충북의 석회암 지대였다. 충북에 기대를 걸고 동굴을 뒤지러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제보가 석장리를 발굴한 연세대 박물관장이자 선주의 스승인 손 선생에게 들어온 때는 1972년 가을이었다. 그곳은 바로 충북 제천시(당시 제원군) 송학면 포전리의 점말 동굴이었다.

손 선생은 연세대 박물관팀을 이끌고 한 달간의 답사를 떠났다. 점말동굴이 있는 용두산 밑 마을에 방을 얻어 숙식하며 조사를 했다. 동굴은 해발 430m 지점의 산허리 절벽에 뚫려 있었다. 동굴은 여러 개였다. 어떤 동굴은 수직으로 돼 있어 진입이 쉽지 않아 자일을 걸고 들어가야 했다. 이곳에서 동물 뼈가 나왔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약재상들이 먼저 와 뼈들을 챙겨갔기 때문이다. 동물 뼈를 두 가마나 퍼내 경동시장 한약상에 팔아치웠다고 했다.

위쪽의 동굴에서는 37종의 동물이, 아래쪽 동굴에서는 18종의 동물의 뼈가 확인되었다. 이 중에는 원숭이 말, 들소, 동굴 곰 등의 절멸종도 나타났다. 뼈를 보고 어떤 동물인지 판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손 선생을 비롯 10여명의 답사단원 중에 동물비교학을 공부한 사람은 없었다. 한국에 구석기 시대 동물 화석이 나타난 건 제천 점말동굴이 처음이었다. 역사적인 조사였다. 이전 사례가 전혀 없었기에 그만큼 어려웠고 험난했다.

동물 뼈를 구해야 비교할 수 있었다. 당시 동물원 기능을 하던 창경원(현 창경궁)을 찾아가기도 했다. 건물 2층에 박제해놓은 동물 뼈를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손 선생은 연세대 박물관에 딱 한 질 있었던 <고생물학>(Paleontologia sinica) 을 보면서 동물 뼈를 익혔다. 중국에서 베이징원인 화석이 나온 저우커우뎬(周口店) 유적의 동물 뼈를 분석한 1934년 판 책이었다. 동물 뼈 화보는 귀한 자료였지만 1차원 그림이었다. 앞뒤와 좌우를 3차원으로 볼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사람 뼈도 구해야 했다. 동굴에서 나온 뼈가 동물이 아닌 사람 뼈일 수도 있었다. 사람 뼈는 더더욱 구할 데가 없었다. 의과대학에서 빌려올 수도, 돈을 주고 모조품을 사올 수도 없었다. 궁리 끝에 동굴 주변 마을에 있는 폐묘를 알아보기로 했다. 극약처방이었다. 동네 사람들의 허락을 얻어 연고가 없는 이의 무덤을 파 뼈를 꺼냈다. 점말동굴에 가져와 판 위에다가 뼈를 가지런히 놓았다. 아세톤 용액에 세척을 하기 전이라 뼈에는 기름기가 끼어있었다. 해가 막 지려는지 어둑어둑했다. 박물관의 사진촬영 담당자가 무심코 담뱃불을 붙였는데 불똥이 뼈에 떨어졌다. 나무뿌리가 들어가 있던 머리뼈 눈과 코 부위에 불이 붙었다. 선주는 인골의 눈과 코에서 시퍼런 불꽃이 타오르던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선주가 손 선생과 함께 두번째로 점말동굴에 갈 때는 동굴 앞마당 가까운 곳에 나무로 작은 집을 지었다. 인근 마을 농부들에게 추수를 끝낸 짚단을 구해와 지붕을 만들었다. 서울 청계천에서 발전기를 구입해 전선을 연결하고 동굴 속에 조명시설을 만들기도 했다. 이곳에서 선주는 뼈 분류 작업과 답사단 살림을 책임지는 내무를 맡았다. 뼈 분류작업을 하면서 경화처리도 배웠다. 폴리바이닐아세테이트(PVA) 용액을 뼈에 적정하게 침투시켜 뼈대를 단단하게 하고 손상을 막는 작업이었다. 일종의 코팅 처리였다.

제천 점말동굴의 학문적 쟁점은 동물 뼈를 누가 남겨놓았느냐였다. 손 선생은 선사 인류가 사냥을 하고 남겨놓았다고 생각했다. 동물 뼈를 연모(도구)로 사용했다고 보기도 했다. 동물 화석을 사람이 깼느냐 동물이 깼느냐는 중요한 연구과제였다. 루이스 빈포드(lewis Binford, 1931~2011)는 사람이 사용하느냐 동물이 사용하느냐에 따라 뼈의 깨진 모양이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연구한 학자였다. 그에 따르면 점말동굴의 뼈를 사람이 남겨놨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선주는 미국에서 교수들에게 점말동굴 사진을 보여주었다. 교수들은 하나같이 “동물이 남긴 흔적”이라고 말했다. 유학 중 한국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펄펄 뛰는 교수들이 있었다.

제천 점말에서 정신없이 생활하는 동안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1973년 봄이었다. 선주는 사람 뼈를 가지고 논문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점말에서 동물 뼈에 너무 익숙해졌지만 마지막 목표는 사람 뼈였다. 그렇게 마음먹고 처음 찾아간 곳이 영남대 박물관이었다. 영남대 박물관에는 1969년 10월 경산군(현 경산시) 자인면 자인중고등학교 뒤 구릉지대 고분에서 발굴된 인골이 하나 있었다. 발굴한 영남대 학술조사단은 이 인골을 1400여년전 가야국 시대의 것으로 추정했다. 인골은 거의 조각으로 발굴된 상태였다. 선주의 용건은 간단했다. 인골을 빌려달라고 했다. 논문을 써보겠노라고 했다. 박물관장이 인골 책임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불가하다는 답이 왔다.

얼마 있지 않아 다른 인골이 선주를 찾아왔다. 그것이 어떤 거대한 출발점이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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