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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실종 뒤 8개월…경식의 치아가 모두 사라졌다 [본헌터㉔]

등록 2023-09-13 11:00수정 2023-09-13 14:03

[역사 논픽션 : 본헌터㉔] 낯선 세계의 경식
용문산 352고지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에서 받아든 노동자의 뼈
2010년 9월7일 23년 만에 입관식을 하는 경식의 유골. 왼쪽 머리뼈 아래가 등뼈이고 그 옆에 위팔뼈, 앞팔뼈, 뒤팔뼈, 갈비뼈 등이 보인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2010년 9월7일 23년 만에 입관식을 하는 경식의 유골. 왼쪽 머리뼈 아래가 등뼈이고 그 옆에 위팔뼈, 앞팔뼈, 뒤팔뼈, 갈비뼈 등이 보인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제가 인터넷 관련 자료 이런 거 저런 거 쭉 찾아봤는데요.”

경호가 입을 열었다. 그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 조사관이다. 의문사위는 2000년 10월 출범해 2004년 6월까지 활동한 한시적인 국가기관이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진실을 밝히는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 경호가 또 말했다. “우리나라 뼈대학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으신 분이, 체질인류학을 전공한 선생님이시더라고요.” 그는 경식의 죽음을 밝히는 임무를 맡아 자료를 보던 와중에 선주의 이름을 찾아냈다. 경호와 선주는 그렇게 처음 만났다. 2001년 5월의 일이다.

경호와 선주를 이어준 경식에 관해서 먼저 이야기해보자. 경식은 노동자였다. 1959년생이다. 경남 의창군에서 태어났다. 1984년 대우중공업에 입사하여 선반공으로 일했는데, 노조활동을 하다 폭행사건에 휘말린 직후인 1987년 6월8일 실종됐다. 전국 각지의 노동 현장에서 대규모 파업투쟁이 벌어졌던 이른바 노동자대투쟁 한 달 전이었다. 그리고 1년여 만인 1988년 3월2일 경남 창원 불모산에서 일어난 불을 진압하던 사람들에 의해 유골로 발견됐다. 경식은 죽어서 ‘열사’라 불렸다.

2001년 봄, 경호는 경식의 유골을 보고 있었다. 경식의 엄마 을선은 1988년 아들의 유골의 발견된 뒤 12년간 매장이나 화장을 하지 않았다. 왜 죽었는지 확실히 알 때까지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했다. 집 창고에 유골을 보관해두고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냈다. 경호는 을선에게 받은 경식의 뼈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야 했다. 이왕이면 대한민국 최고의 뼈 권위자를 찾아 묻고 싶었다.

충북대 교수였던 선주는 그 시기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엄소리 용문산 352고지에 있었다. 경호가 2000년부터 의문사위 조사관으로 활동했다면, 선주는 2000년부터 국군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을 하는 육군유해발굴단의 책임조사원 일을 맡고 있었다. 경호는 불모산에서 발견됐던 경식의 뼈를 상자에 담아 용문산 352고지의 선주에게 갔다. 경호는 자신이 어떻게 하여 선주를 찾아오게 됐는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선주가 일하는 현장은 1951년 5월18일부터 21일까지 국군 6사단과 중공군 63군 예하 3개 사단이 전투를 벌인 곳이었다. 이곳에서 군인 유해를 발굴하는 중에 짬을 내어 1980년대 의문의 죽음을 맞은 노조운동 활동가의 뼈를 감식하게 될 참이었다.

경식의 뼈를 본 선주는 깜짝 놀랐다. 잇몸이 깨끗했다. 위턱과 아래턱 치아가 다 빠져있었다. 치아가 빠져도 찌꺼기가 남을 텐데 그조차 없었다. 풍치를 앓거나, 인위적으로 약품을 이용해 처리하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목뼈도 깨끗했다. 경식은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됐다고 했다. 나무에 목을 맨 채로 오랜 시간 있었다면 목뼈에 흔적이 남았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어찌 이렇게 깨끗할 수 있는지 의아했다. 실종에서 발견까지 1년도 안 된 시기에 주검이 완전하게 육탈됐다니 이해되지 않았다. 주검의 상태 변화엔 습도와 온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번의 여름을 온전히 거치며 부패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뼈만 남고 모든 치아가 사라질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선주는 미국의 테네시주립대학의 윌리엄 바스(Willian M.Bass) 교수가 운영했던 ‘데쓰 팜’(death farm)을 떠올렸다. 직역하면 ‘시체 농장’이었다. 바스 교수는 주검을 땅속에 묻어 6개월이나 1년씩 변화하는 과정을 실험한 연구를 했다. 제일 빨리 상하는 경우는 구더기가 온몸을 뜯어먹을 때였다. 주검에 비닐을 덮어 그 안에 구더기를 집어넣으면 부패가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고 했다. 한국의 오래된 장례풍습인 풍장도 있다. 풍장은 주검을 지상의 나무나 바위 위에 올려놓아 비바람을 맞고 썩게 하여 자연적으로 소멸시키는 방법이다. 이후 뼈만 추려서 관에 넣는다. 풍장에 관해 알아보니 육탈되는데 아무리 빨라도 2~3년이었다. 경식의 1년은 너무 빨랐다.

오른쪽 팔뼈에는 철심이 박혀 있었다. 경식이 1986년 5월 작업 도중 오른쪽 팔이 드릴에 말려들어가는 산재 사고를 당했을 때의 치료 흔적이었다. 병원에 입원하던 중 같은 회사 노동조합 활동가를 알게 되고 이때부터 노동운동에 눈을 떴다고 했다. 다른 뼈에도 어떤 흔적이 있었다. 선주가 그곳을 들여다보았다.

경호는 선주가 이때 한 말을 평생 잊지 못했다. “견갑골에 설치류의 이빨 자국이 있네.” 견갑골, 즉 어깨뼈에 쥐가 긁은 흔적이 있다는 말이었다. 경식의 엄마 을선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아들 뼈를 라면 박스에 담아 넣어둔 창고에 쥐들이 득시글거렸다는 것이다. 경호는 전문가에 대한 경외감과 존경심이 몰려왔다. 용문산까지 찾아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선주를 생각할 때마다 그 말이 늘 따라붙어 연상됐다. “견갑골에…설치류의…이빨 자국이…있네.”

2010년 9월7일, 실종된 지 23년 만에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 추모공원에서 운구되는 경식의 장례 행렬을 맨 뒤에서 어머니가 따르고 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2010년 9월7일, 실종된 지 23년 만에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 추모공원에서 운구되는 경식의 장례 행렬을 맨 뒤에서 어머니가 따르고 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주검에 대한 인위적인 처리가 분명히 있어 보였으나 증명할 길은 없었다. 경식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결국 해소되지 못했다. 의문사위는 2002년과 2004년 두 번에 걸쳐 진실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고,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위도 2010년에 같은 결정을 내렸다. 경찰과 검찰은 타살 혐의점이 없는 자살이라 결론 내렸다. 가족과 동료들은 믿지 않았다. 목을 맸다는 끈에서 혈흔 반응이 없었다는 점 등이 타살의 근거로 제시됐다. 경식의 일터에서 보안사 요원들이 주동자 색출활동을 했다는 점도 의혹을 키웠다.

마산의 진동에서 생선가게를 하던 엄마 을선은 다른 유가협(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회원들과 함께 경찰서와 대우중공업을 방문해 진상규명을 요구하다가 험한 꼴을 당했다. 폭력혐의로 마산지검에 고소당하고 1989년 실제로 마산교도소에 수감됐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엔 집에 박혀 아들의 유골을 가슴에 품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이를 보다 못한 유가협의 태일 어머니 소선과 종철 아버지 정기가 반강제적으로 경식의 유골을 마석 모란공원 납골당으로 옮기게 했다. 이러다 엄마도 아들을 따라갈 것 같아서였다.

2010년 9월7일 드디어 경식의 장례식이 열렸다. 실종된 지 23년 만이었다. 사진기자에 의해 촬영된 장례식 운구 행렬 사진 속 맨 뒤에 선 을선은 두 손으로 보행기를 잡고 말없이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한없이 헛헛하고 쓸쓸한 여운을 남겼다.

선주에게 이런 스토리는 낯선 세계였다. 경식을 부르는 ‘열사’라는 호칭도 마찬가지였다. 국가폭력이라는 의심을 받으며 선주에게 온 뼈는 경식이 처음이었다. 1997년부터 일본의 홋카이도에서 강제징용 조선인들의 유해를 발굴했지만 결이 좀 달랐다. 2013년 장 선생의 뼈를 만나기도 12년 전이었다. 국가공권력을 잠재적 가해자로 지목한 뼈들의 세계에선 긴장감이 넘쳤다. 그러고 보니 장 선생을 연결해 준 사람도 경호였다.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경호와는 특별한 인연이었다.

경식의 유골을 보내고 선주는 다시 용문산 352고지에서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에 몰두했다. 2001년 5월10일부터 25일까지 이곳에서 10구의 유해가 나왔다. 완전유해는 7구, 부분 유해는 3구였다. 중공군으로 보이는 유해도 하나 포함돼 있었다. 중공군 경기관총 탄창, 탄피류와 중국 이름을 새긴 것으로 보이는 뿔도장이 발견되었다. 1999년 12월, 육군본부 제대군인과 중령 용석의 전화를 받으면서 시작한 일이었다. 2000년은 한국전쟁 50돌이었다. 전사자 유해발굴은 그 기념사업의 일환이었다. 선주는 2000년 3월부터 버클리대 교환교수로 가기로 했었으나 이 일 때문에 포기했다. 2000년에 이어 2001년도 꼼짝없이 이 일에 묶여 전국의 한국전쟁 전투지역을 도는 중이었다.

선주는 352고지에서 발굴이 끝나면 감식을 위해 산 아래편 공터에 쳐놓은 천막으로 내려왔다. 회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두 개의 뼈를 쳐다보았다.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국군 전사자의 머리뼈 하나, 그리고 치아가 깨끗하게 사라진 경식의 머리뼈.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두 개의 뼈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용문산의 밤하늘에서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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