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사고를 주장하는 환자의 유족이 병원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환자 쪽의 입증 책임 기준을 완화한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진료 과실로 인해 손해가 발생할 ‘개연성’이 있었다는 사실만 입증하면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취지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수술과 진료를 받다 숨진 ㄱ씨의 유족이 한 의료재단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7일 밝혔다.
ㄱ씨는 2015년 12월 어깨 관절경 수술을 받다 혈압이 떨어져 심정지로 숨졌다. 병원 마취과 전문의는 ㄱ씨에게 전신마취제를 투여한 뒤 간호사에게 환자의 상태를 지켜보라고 지시하고 수술실을 비웠고, 이후 문제가 발생하자 전화로 혈압상승제 투여만 지시했다. 유족은 “담당 마취과 전문의가 환자 감시를 소홀히 했다”며 2019년 7월 병원을 운영하는 재단을 상대로 1억6천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1·2심 법원은 유족의 청구를 일부 받아들여 9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단이 이에 불복했지만 대법원 역시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기존 대법원 판례는 피해가 기존 질병 등 다른 원인으로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을 입증해야 했지만, 대법원은
환자 쪽에서 과학적·의학적으로 높은 수준의 개연성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고 봤다.
대법원은 “의료행위는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분야로 환자 측에서 의료진의 과실을 증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며 “이러한 증명의 어려움을 고려하면, 과실이 환자 측의 손해를 발생시킬 개연성이 있다는 점을 증명한 경우엔 진료상 과실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정해 증명 책임을 완화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이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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