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준 교수가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국가폭력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요. 국가폭력은 조작과 은폐가 가능해 그 실체를 알기 힘들어요. 그래서 저는 국가폭력에 의한 범죄는 공소시효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해요.”
최광준(59) 경희대 로스쿨 교수의 부친인 고 최종길(1931~1973) 서울대 법대 교수는 꼭 50년 전인 1973년 10월19일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받다 사망했다. 하지만 당시 중앙정보부는 부친의 죽음을 투신자살로 위장하고 심지어 간첩으로 조작까지 해 발표했다. 그로부터 29년이 지난 2002년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를 통해 “최종길 교수가 간첩으로 자백한 사실도 없고 조사 과정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면서 고인이 국가폭력의 희생자였음을 인정했다. 유족들은 이어 국가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도 해 2006년 최종 승소했다. 당시 재판부는 최 교수의 타살 가능성이 크다면서도 정확한 사인은 판단하지 않았다. “고문으로 사망했거나 혹은 가혹 행위를 견디지 못해 이를 피하려다 사망했거나 아니면 의식불명 상태에서 건물 밖으로 던져져 사망한 사실이 인정된다”고만 밝혔다.
최종길 교수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972년에 아들 광준과 파리 에펠탑 전망대에서 찍었다. 최광준 교수 제공
지난 13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연구실에서 만난 최 교수는 50년이 흐른 지금도 부친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 수 없는 것을 애통해했다. “자식으로서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정말 알고 싶어요. 사인을 정확히 밝히는 것은 인권의 역사에서 꼭 필요해요. 인권침해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아야 교훈이 되고 다시 반복되는 것도 막을 수 있죠.”
이런 그의 소망은 번번이 공소시효라는 벽에 막혔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1988년에 고문수사관들을 수사해달라고 고발했지만 검찰은 공소시효가 만료돼 기소권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2002년에는 의문사진상규명위 조사에서 차철권 중정 수사관 등 아버지를 고문한 가해자들을 알아냈지만 공소시효 때문에 법의 심판대에 올릴 수 없었다. 살인죄는 2007년에 공소시효가 폐지되었지만 이전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최 교수는 반인권적 국가폭력 범죄는 공소시효를 없애고, 아직 시효가 만료되지 않은 사건은 소급입법을 해서라도 과거 사건을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가 1998년에 만든 단체 ‘최종길교수를 추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오는 19일에 50주기 추모제에 더해 국가폭력근절 선포식을 따로 하는 데도 이런 문제의식이 있다. 이 단체는 19일 오전 경기 성남 마석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서 추모제를 하고 오후에는 서울 중구 옛 중정 본관 자리인 서울유스호스텔 세미나실에서 국가폭력근절 선포식을 연다.
“그간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분들을 기억하고 앞으로 희생양이 될 수도 있는 분들은 보호하자는 취지로 마련했죠. 중정 건물에서 시신이 발견된 아버지도 진상을 밝히는 게 이렇게 힘드니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는 오죽하겠습니까. 그런 상황을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파요.” 이런 말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진상을 제대로 밝혀 국가권력이 국민을 죽음으로 내몬 사실이 드러났다면 한국 민주화는 더 일찍 왔을 겁니다.” 선포식에선 이해학 목사가 선언문을 낭독하고 함세웅 신부와 김정남 선생 등 최종길 교수 죽음의 진실 규명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 추도사를 할 예정이다. 앞서 18일에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9통일평화재단 주최로 ‘국가폭력과 인권침해-법적, 사회적 해결을 위하여’ 50주기 추모 학술회의가 열린다.
법학자인 최 교수의 학업 이력에는 남다른 데가 있다. 아버지가 박사 학위를 받은 독일 쾰른대로 1984년 유학을 가 학사와 석·박사까지 마쳤다. 전공도 아버지와 같은 민법이다. “항상 다정하고 친구 같았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그리움이 컸어요. 그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길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컸죠. 아버지가 남긴 영어와 독일어로 된 방대한 법학도서를 언젠가 다 읽어내겠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아버지가 하려고 했으나 못 이룬 학문이나 가르치는 일을 제가 대신해드리고 싶었죠.”
아버지 중정서 고문 받다 사망했으나
유신정권, 투신자살 위장에 간첩 조작
2002년 의문사위 ‘국가폭력 희생’ 인정
공소시효 벽으로 가해자 수사 못 이뤄
“중정서 시신 발견돼도 이리 힘든데
다른 국가폭력 피해자는 오죽할까”
18일 국가폭력과 인권침해 학술대회
19일 추모제·국가폭력 근절 선포식
“희생자에 대한 기억공간 만들고파”
그가 고교를 나와 1년 뒤 독일로 떠난 데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려는 의도도 컸다. “2015년에 작고한 어머니(백경자)는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면 아버지 죽음의 진실도 자연스레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아무것도 바뀐 게 없자 실망이 너무 컸어요. 그래서 진실 규명을 위해 해외로 나가야겠다고 맘먹었죠. 처음엔 망명을 생각했는데 주한 독일대사가 만류하더군요. 차선책으로 제가 독일 유학을 가기로 했죠.”
진실 규명 사명을 안고 도착한 독일에서 그는 서둘러 부친이 미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교환교수 시절 인연을 맺은 저명한 교수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당시, 주일 미국대사도 지낸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의 답신을 받고 다소 실망했던 기억이 있어요. ‘돕고 싶지만 구체적으로 도울 길이 뭔지 잘 모르겠다’는 내용이었거든요.”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귀국한 그는 부친 25주기에 ‘최종길교수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모임’ 결성을 이끌고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캐는 데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지난해 독일인 학자들과 ‘한국과 독일의 과거청산과 기억문화’를 공저한 그에겐 이루고 싶은 꿈 하나가 있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를 모두 아우르는 기억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2020년부터 2년 진실화해위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독일의 과거 청산 개념에는 진실규명과 배보상 그리고 희생자에 대한 기억문화가 함께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진실규명 단계이죠. 우리도 진실규명에서 더 나아가 희생자에 대한 기억은 물론 그 유족 목소리까지 모두 보관해 후손들에게 들려줘야 할 숙제가 있어요. 여기에는 국가폭력으로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들까지 포함해야죠. 의문사 진상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 것은 우리의 문제이니까요.”
그는 ‘기억의 공간’ 모델로 독일 베를린에 있는 홀로코스트 추모관을 들었다. “젊은이들이 많이 올 수 있는 문화예술 공간과 커뮤니티 활동 기능을 함께 갖췄더군요. 나치 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이 모두 디비화되어 언제든 불러낼 수 있죠.” 그는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했다. “먼저 기억관 설립을 위한 가칭 진실화해재단을 만들어야죠. 현행 진실화해법에도 재단을 설립할 수 있다고 되어 있어요. 법적 근거가 있는 거죠. 독일도 200여 개의 ‘기억의 터(Memorial Place)’가 있는데 크고 작은 재단이 관리·운영하고 있죠.”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아버지를 잃기 전 꿈을 물었다. “화가가 되고 싶었죠. 어릴 때 그림을 잘 그렸어요. 미술대회에서 상도 여러 차례 받았죠. 아버지가 제가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뒤에서 흐뭇하게 보던 기억도 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